바야흐로 3월의 중순이었다. 내가 이유 모를 벅찬 표정으로 상담실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자 선생님이 왜 그러냐 물으셨다.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별건 아닌데... 오늘 지하철을 올라오면서 어둡지 않더라고요. 항상 이곳에 올 때는 해가 완전히 진 후였는데, 아직 어둡지 않은 게 기분이 이상했어요. 제가 작년 12월 즈음 상담을 시작했으니 시간이 참 많이 지났다 싶기도 하고요. 이제 겨울이 다 갔구나,라는 감회도 드네요. 상담실에 있는 식물도 다 잘 살아남았고요.
-정인 씨도 그만큼 매서운 겨울을 잘 견딘 거죠. 가장 뜨거운 여름도 결국은 지나가고, 가장 추운 겨울도 결국은 지나가기 마련이에요.
다음 주면 베란다에 있는 화분을 감싸고 있는 지푸라기들을 벗길 예정이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시면서 미소 지으셨다.
-한 주간 어땠어요?
-별 일은 없었어요. 단지 정신과약을 단약 해서 그런가, 화병이 계속 올라오는 거 빼고요. 아아... 내일 기간제들한테 이제 유급 병가는 없다,라고 말을 해야 해요... 단호하게 말해야 하는데... 그 의사들은 "나쁜 소식 전하기"라는 걸 배우잖아요. 저도 비슷한 기분이에요. 나쁜 소식을 전해야한느데 떨면서 말하면 만만하게 보일까 봐 무서워요...
산만하게 몸을 흔들다가 이윽고 소파 팔걸이에 빨래처럼 축 늘어진 채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기간제 병가에 관한 사항은 법적으로 줘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지 않아요. 심지어 유급/무급 유무까지 전적으로 담당자 재량에 가깝죠. 그럼에도 저는 유급병가를 줬었어요.
그랬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아파서 쉬겠다 하면 괜찮냐고, 그러라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유급병가 사용 횟수가 확 늘더라고요. 그것도 한 명씩 순서대로 돌아가면서요. 심지어 감기, 부비동염, 위염, 장염이에요. 물론, 통증의 정도는 다 다르고, 다른 사람이 이 사람이 일하지 못할 만큼 아픈지 어떻게 판단을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진단명들이 다...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한국인 중에 위염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설마 관리자가 같은 사무실에 있지 않다고, 서로 이야기해서 병가를 하루씩 쓰는 건가, 의심이 드는 거죠...
선생님은 의아한 듯 질문하셨다.
-좀 더 두고 볼 수도 있지 않았나요? ABCA까지 확인했으면, ABCABC로 돌아가는지까지 조금 시간적 여유를 두고 볼 수 있었을 텐데요. 그걸 방치하면 당장 문제가 생기나요?
-아니요... 하지만 그걸 제 눈으로 확인하기 싫었어요. 지금은 단순히 의심이 간다 정도지만, 담당자 재량으로 허용한 유급병가를 돌아가면서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면... 제가 너무 실망할 것 같아요. 그게 무섭네요. 그리고 사실은, 제가 나쁜 말을 하기 싫어서 이 상황을 방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요. 믿고 알아서 잘 일하고, 정말 근무하지 못할 정도로 아플 때만 병가를 쓸 거라는 생각이 너무 나이브하고 안일했다는 생각, 직원들의 근태를 더 꼼꼼히 확인했었어야 했다는 생각도요. 그동안 제가 너무 착한 사람으로만 있고 싶고, 편하게 일하고 싶어서 눈 감고 있던 게 아닌지... 하하. 우습죠. 오만 생각이 다 든다니까요.
내가 해야 할 일을 그동안 모진 소리 하기 싫어서 미루고 있던 게 아닌지, 그게 사실은 제일 무섭다.
-아무래도 공무원이라 해도, 각 기관마다 분위기가 달라요. 저희 부서는 거의 암 치료나 수술 아니면 병가를 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에요. 제가 전에 목소리가 2주 동안 안 나올 정도로 아플 때가 있었어요. 기침이 너무 심해서 기침하다가 종종 토할 정도로 아팠는데, 그때도 병가를 못 쓰고 가장 아팠던 날만 이틀가량 연차를 썼었는데 좀 서럽더라고요. 내가 쉬고 싶어서 쉬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같이 일하는 기간제 선생님들의 편의를 좀 봐드리고 싶었어요. 아플 때 일하면 서럽잖아요. 그런데 뭐랄까, 부비동염으로 아프다고 병가 쓴 선생님도 다음날에 마스크도 안 끼고 너무 멀쩡한 걸 보니까, 이 제도가 악용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요... 제가 그동안 너무 물렀구나 싶어요.
선생님은 출산휴가로 2달을 받았다는 옛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리고 선생님의 선배들은 한 달이었다고. 그래서 출산휴가를 방학에 맞춰서 쓰는 게 관례였는데, 그걸 맞추지 않으면 눈총이 쏟아졌던 이야기를. 그 이야기를 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겪은 것을 다른 사람이 겪지 않게 하려 노력하는 것은 윗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야지 변화가 쉬워요. 정인 씨는 노력을 했군요.
그걸 한 게 잘한 건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다. 이게 내 노력이 맞긴 한가? 방임이 아니라? 한숨이 나왔다.
-그랬죠... 하지만 이제는 연차를 먼저 소진하라고 말할 거예요. 아침에 아파서 병원 다녀오는 것도 연차를 쓰라고 말할 거고요.
-좀 전에 나쁜 소식 전하기,라고 했죠. 저는 정인 씨가 전하는 게 왜 나쁜 소식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바뀐 규정을 알려주는 게 아닌가요?
듣고 보니 맞는 소리다.
-그걸 나쁜 소식이라고 생각하는 건 정인 씨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그걸 생각하면서 본인이 더 무섭고, 떨리고, 긴장이 되는 거예요. 하지만 정인 씨가 전달하려는 내용은 본질적으로 규정이 바뀌었으니 업무에 참고해라,라는 말이죠. 그게 과연 나쁜 소식일까요? 정인 씨는 어머니가 불안해하고 긴장되어 있으면 그걸 느낄 수 있나요?
-그럼요. 느끼지 못하면 바보죠. 슬슬 피해야죠.
-마찬가지로 정인 씨가 긴장되어 있으면, 소식을 듣는 사람도 긴장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는 텍스트가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이 사람의 불안과 떨림이 느껴지고, 감정만 들어오게 돼요.
그렇구나. 나만 이야기하면서 떨리는 게 아니라, 상대도 잔뜩 긴장해서 듣게 되는구나.
-저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듣는 상대를 위해서도 제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말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선생님은 담백하게 얘기해 보라고 예시를 들어주시고는 지금까지의 대화를 정리하셨다.
-이제는 말해야겠어!라고 의사결정을 하는 친구가 있는 한편 내가 너무 예민한가? 피해망상인가?라고 의심하는 친구가 있네요. 하나씩 테이블에 앉혀서 대화해 보죠. 문제를 말해야겠다는 친구의 주장부터 들어봐요.
-이 친구가 지금 일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상황은 문서화, 명문화된 규정이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에요. 가이드라인이 있어야지 제가 예측하지 못하는 변동사항이 생기지 않고, 제가 관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일을 해결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모두와도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사항에 대해 말을 할 수 있고요.
-아하. 가이드라인이요. 그렇게 해서 정인 씨가 불안해하지 않고, 일을 잘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군요. 만약에 정인 씨가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거에 대해서는 트라우마에 가까운 기억이 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전에 뽑았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예요. 저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분이셨는데, 면접점수를 잘 받아서 채용이 되셨어요. 개인적으로는 느낌이 별로 안 좋았는데도 면접위원들 눈이 틀리지 않겠지 생각하며 위험신호를 무시했죠. 그런데 제가 나이도 어리고 여자니까 만만하게 보시더라고요. 근로자가 일을 안 해요. 시키는 일도 안 하고, 흡연하다가 지각도 하고요. 접수대에 엎드려서 이어폰 끼고 잠도 자요. 그러면서 민원인이 오는 걸 모르겠다고 자동문에 풍경을 달아달라는 어처구니없는 말까지 하죠. 정부시스템으로 여자직장동료 개인정보를 찾아내서 구글링도 하고요. 그리고 불친절로 민원도 들어오죠. 그걸 또 제가 해결해야 해요. 결국 이 사람은 나중에 계약연장이 안 됐다고, 제 탓을 했어요. "주임님이 뒤에서 제 욕 하고 다닌 거 다 알고 있는데 모른척했다. 주임님이 나 싫어하는 거 얼굴 표정부터 메신저까지 다 드러나는 거 알고 있냐. 어쨌든 주임님 때문에 계약연장이 안 됐다. 우리 계약 종료일까지 예의 차리면서 잘 지내보자."라는 식으로 장문의 메신저가 왔을 때 정말 무서웠거든요. 너무 놀라서 메신저를 3개월치를 뽑아서 보는데, 도무지 어디서 싫은 티를 냈다는 건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일이 이지경이 되고 나니 어머니도 호신용품을 사주겠다고 몸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실 정도였어요. 저는 그 사람 때문에 몇 개월 간 불면증이 있었고, 이대로 가다가는 내가 죽던지, 저 사람을 죽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수영을 시작했어요.
-세상에. 너무 위험한 사람이었는데요? 그때 예상치 못한 상황을 겪으면서 실제로 위험해졌던 경험이 있군요. 저는 의사결정을 내리려는 친구가 너무 이해가 돼요. 정인 씨는 어때요? 지금 그 친구가 일을 잘하고 있나요?
-그럼요. 아주 도움이 되는 친구죠.
-그럼 내가 피해망상인지 의심하는 친구를 봅시다. 그 친구는 왜 거기 있나요?
-제가 폭주기관차처럼 급하게 의사결정 내리는 걸 막기 위해서요. 최종 결정을 성급히 하기 전에 혹시라도 잘못된 게 아닐까? 하면서 브레이크를 걸게 해 줘요. 그 브레이크가 사실 큰 소용은 없지만요.
그 브레이크가 그간 제대로 작동했던 적이 있었는지를 떠올려보려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의사결정을 하는 친구도 근거 없이 의사결정을 내리는 친구는 아니에요. 주변 기관에 다른 기간제들의 처우를 물어보고, 노무사에게 자문도 구했죠.
-오, 사실 그렇게 위험상황에 대비하는 건 의사결정하는 친구가 아니라 피해망상인가 스스로를 의심하는 친구인 것 같은데요. 혹시라도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게 최선의 준비를 하고 있잖아요.
-그렇네요...? 의심하는 친구는 브레이크가 아니라 오히려 서포트해 주는 역할을 하나 봐요.
-그렇죠. 만약에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는 친구가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잘못된 판단을 거침없이 내리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도 100% 맞을 수는 없으니까 판단을 내리기까지 계속 의심하고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음대로 판단하고 규정해 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데요?
-다른 사람을 손쉽게 비난할 것 같아요.
-그러면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선생님이 물으셨다.
-스스로를 안 예뻐할 것 같나요?
-네. 사실은 그 사람한테 소리를 질렀던 적이 있어요. 한 달 동안 검체 관리를 아예 안 해서 월말에 관리 대장을 보니 수량 체크도 안되어있고, 검체들은 모조리 유통기한이 지나있더라고요. 하필 그 주에 불친절로 민원이 들어오고, 타 부서에서도 내부민원이 들어왔었어요. 그 부서 실장님이 성격이 지랄 맞기로 유명한 분이라서 진짜 소리 지르는걸 굽신거리면서 10분을 듣고, 원래 검사실에서 했던 업무를 저희가 하도록 업무프로세스를 바꾸게 되었고, 저는 사무실로 들어와서 그 사람한테 소리를 질렀죠. 선생님의 업무태만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러고 나서, 제 사무실로 돌아가서 2-3분을 씩씩대면서 울고 진정이 된 다음에 다시 그 사람한테 사과를 했어요. 방금은 잘못을 지적한 것뿐만이 아니라 내가 화난 것까지 쏟아냈다, 미안하다, 과했다. 그 사람은 자긴 너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잘 안된다면서 속상하다고 하지만... 그 사람은 뭐든 억울한 척을 잘했어요. 말만 잘하죠. 인수인계장을 한 달이 되어도 읽을 생각도 없이 대충, 한 달 동안 관리대장 펴보지도 않았으면서... 자기가 저지른 일에 자기가 책임을 지면 된다고 하는데, 책임을 질 정도의 능력이 있었으면 애초에 사고를 안 쳤겠죠. 무엇보다 본인이 책임을 질 위치가 아닌데도 사고만 쳐서, 담당자가 다 뒤처리를 해야 하는데... 후... 그리고 제가 제 사무실로 돌아가고 나니까, 그 사람은 저한테 소리 지른 거에 대한 사과를 받았다고 자기 잘못이 아무것도 없는 양 의기양양 해했다 하더라고요. 사과를 괜히 했다 싶기도 하지만 사과를 하지 않으면 제 마음이 너무 불편했어요...
-정인 씨가 사과를 한 건 잘한 일이에요. 그저 그 사람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하는 거죠. 사과를 받고 자기 잘못을 돌이켜볼 수 있는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처럼 자기 잘못이 없던 양 구는 사람은 지질한 거예요.
-하하하. 맞아요 선생님. 다시 생각해도 그때 사과한 게 후회는 안 돼요. 그 사과는 그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저를 위한 거였으니까요.
-그럼요. 정인 씨가 스스로를 예뻐하지 않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함이죠.
한참을 떠들다가 기운이 빠져 소파에 말 그대로 널브러진 채 중얼거렸다.
-사람관리가 너무 어려워요 선생님...
-원래 그래요. 좋은 사람을 채용해야 하고, 그 사람이 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그 사람이 잘못했으면 피드백을 줘야 하고... 일이 정말 많죠.
-제가 아랫사람들을 너무 어려워하나 봐요. 차라리 윗사람들은 이 정도로 어렵진 않아요.
-윗사람들만 어렵고 아랫사람들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아요?
-하하하하하. 맞는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정말이지 비겁해 보이거든요. 되게 싫어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 그것보다는야. 나아지고 있겠지.
다음날 기간제근로자들에게 그냥 날씨를 말하는 것처럼 전달했다. 내 불안을 잠시 옆으로 미뤄놓고, 서로를 위해서 천천히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했다. 상담이 트라우마 극복뿐 아니라 직장생활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