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와한 출산기 5

우아하진 않지만 우와하게

by 세잎

굴욕 3종세트


자연분만과 관련해서 언제부터인가 "굴욕 3종세트"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관장, 제모, 내진 이 3가지를 소위 굴욕 3종세트라고 부르는데 사실 나는 이를 굴욕이라 부르고 싶지는 않다.

의료적 행위에 불가하기 때문에 굴욕적이라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정도에 따라 불편할 수는 있다.


관장.

내 소중한 아이와 내 소중한 아이를 받아주실 의사 선생님, 그리고 내가 소중하게 먹은 후 소화된 음식이 서로 하이파이브하길 원치 않지 않은가. 너무나도 필요한 과정이다. 인내와 배출 순리의 시간일 뿐 굴욕적으로 느낄 필요 없다.


제모.

제모는 사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만 직전 고통에 몸부림칠 때 후다닥 해주셔서 굴욕인지 아닌지를 느낄 새도 없었다.


내진.

내진은 워낙 사람마다 차이가 크다. 정기검진 때의 질초음파보다 살짝 더 불편한 정도로 느끼는 분들이 있는가 반면 악소리 나게 너무 아팠다는 분들도 있으시다. 나는 전자에 해당한다. 내진은 분만과정 중 아이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의료행위라 생각하면 굴욕적이지 않다.


이 유명한 3종세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를 당혹하게 만든 존재가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수술용 대바늘이다.



분만의 거의 첫 준비라 할 수 있는 수술용 대바늘 꽂기.

나는 원래도 혈관이 매우 얇은 편이라 피 뽑거나 수액을 맞을 때에도 여러 번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그래서 진통보다 이 순간을 더 두려워했었다.


역시나.

간호사 선생님이 왼쪽팔에 첫 시도를 하셨으나 실패했다.

"죄송해요 반대쪽 팔에 다시 해볼게요."

두 번쯤이야 나도 대수롭지 않았다. 숱한 찔림의 경험이 있었으니 두 번쯤이야.

기꺼이 찌르세요. 내 오른팔을 내어드리이다.


"앗.. 또 안되네.. 정말 죄송해요 산모님."

아.. 한쪽팔이 안되면 반대쪽 팔에서는 늘 성공했었는데......

결국 다시 왼쪽팔로 돌아왔고 두꺼운 수술용 대바늘이 거침없이 혈관을 찾는 듯 요리조리 움직이는 게 다 느껴졌다.


아.. 아프다..


통증 잘 참는 내가 아주 작게 '아프다'는 표현을 처음 내뱉고 말았다. 병원에 와서 내가 처음으로 외친 고통의 표현이 이 순간일 줄이야. 결국 다른 간호사선생님으로 바뀌고 새로운 간호사 선생님의 심기일전 4번째 시도 끝에 내 팔에 당당히 바늘이 꽂혔다. 양쪽팔에 2개씩 붙여진 총 4개의 밴드는 훈장이라고 해야 할까.




오후 12시쯤

바늘과의 싸움이 끝나고 이제 본격적인 입원 준비를 시작하듯 내진을 해주시러 간호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바늘과의 전쟁에서 이미 나와 끈끈한 전우애가 생긴 간호사 선생님께서 이번에는 갑자기 "어머"라며 놀라움을 표현하셨다.


6cm 열렸어요!!


이제 막 입원 준비를 마치고 제대로 분만과정을 시작하나 했는데 바로 6cm라니.

"안 아프세요? 괜찮으세요? 보통은 3cm 열릴 때까지도 무통 찾으시며 고통스러워하시기도 해서요"

"6cm라고요???? 전 괜찮아요. 참을만한데요."

"세상에!! 일단 바로 마취과 선생님 불러드릴게요."


곧이어 마취과 선생님이 오셨고, 마취과 선생님은 분명 6cm 열리신 산모님이라고 콜 받고 온 건데 본인 맞냐며 놀라셨다.

그도 그럴 것이 환자 침대에 누워서 마취과 선생님 보자마자 반가움에 웃으며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인사를 건넸으니 말이다. 그날 본의 아니게 여러 의료진분들을 놀라게 했다.


"통증을 없애주려고 무통주사를 맞는 건데 이미 6cm~7cm가 열렸고 사실 지금 산모님은 통증이 없으셔서 이 주사를 맞는 게 의미가 있나 싶기는 해요....."


사실 나도 통증이 없었기에 순간 무통주사를 안 맞을까도 싶었다. 하지만 현대의학기술을 누려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효과를 못 보더라도 일단 맞겠다고 했다. 단, 이미 자궁문이 많이 열린 상태라 원래 양의 절반 정도만 맞기로 했다.


자궁문 7cm가 열리고서야 출산가방 가지러 간 남편은 돌아왔고 남편은 이 상황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잠깐 짐 가지러 다녀온 사이 7cm가 열렸다니. 내가 생각해도 황당하다.

병원에서 집까지 왕복 10분 거리일 뿐이었으니 더욱이 그럴 만도 하다.



오후 2시쯤

얼마가 지났을까.

간호사 선생님들도 이렇게까지 아무 느낌 없으신 산모님은 처음이라고 주치의 선생님과 상의하시더니 촉진제를 맞기로 결정했다. 그때 내가 체온이 올라가고 있던 상태에서 자궁문은 다 열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진통이 오지 않으면 혹시라도 위험한 상황이 올 수 있다고 판단하신 듯했다. 나는 의료진 분들의 판단을 믿고 따르겠다고 했다.


촉진제의 힘인가.


아무런 통증 없이 기다림의 순간을 즐기던 나에게 드디어 처음으로 통증다운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조금씩 서서히 미리 와줬으면 마음의 준비라도 했을 텐데. 이렇게 갑자기 온다고?


뭐랄까.

수박 한 통이 질 입구에 꽉 끼어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열 달 동안 잘 숙성시킨 달달하고 맛있는 수박이 지금 당장 수확해 달라며 스스로 온몸을 통통 튕기면서 외치고 있는 듯했다.


잠깐만 기다려줘!! 농부아저씨 아직 안 오셨다고!!!


살짝만 힘주면 그 수박이 뿅 하고 나올 것만 같은데 이걸 받아줄 의사 선생님이 안 계시니 나로서도 난감한 순간이었다. 힘을 안 주는 게 더 힘든 순간이었다.

거기다 양수가 터진 건지 갑자기 아래가 축축하게 흥건해지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처음으로 몸을 베베 꼴 정도의 고통이 찾아왔다.


"간호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 좀 불러줘요!!! 아까 안 맞은 무통 추가로 달라고 해줘요!!!!"


옆에서 덩달아 편하게 쉬고 있던 남편이 처음으로 다급하게 문을 열고 나갔고,

남편이 간호사선생님께 상황 설명을 하러 간 사이 다른 간호사 선생님이 주기적으로 산모상태 확인차 내진을 하러 들어오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때마침 내진하러 들어와 주신 그분이 내 구세주였다.


나의 고통스러운 신음과는 달리,

간호사 선생님은 아직 분만실에 들어온 지 3시간도 안된 애송이 산모에게 아기 보려면 아직 멀었다는 것을 평정심으로 보여주시려는 듯 평온하게 말씀하셨다.

"내진 한번 해볼게요~"


그런데 갑자기 그 평정심을 깨뜨리시며 다급하게 외치기 시작했다.

"아기 나온다 나와. 분만준비해 빨리!!!"



병원 온 지 약 3시간 만이었다.

병원에 와서 제대로 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지는 10분.

심지어 간호사 선생님을 부르러 간 남편이 돌아오지도 않은 아주 짧은 찰나.


우리의 진격의 룰루군 엄마에게 아주 강력한 신호를 보내며 출격 준비 중이었다.


분주하게 들어오는 의료진 사이로 간호사 선생님을 부르러 간 남편이 같이 돌아왔고, 그저 무통주사 넣어달라고 말하러 간 남편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해했다.

(그날 여러 번 어리둥절한 남편)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놀라서 서있는 남편에게 간호사 선생님은 파란색 위생복을 건네주셨다.

아기 볼 준비 하셔야 한다고.

무통주사 추가로 넣어달라고 말하러 갔다가 갑자기 탯줄 자를 준비를 하게 된 남편이 허둥지둥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때가 됐다. 아까 먹은 초코바 값을 해야지.
엄마 준비됐다. 눈치 장착했으니 신호 주렴.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초강력 진통이 찾아오고 길게 끌어봤자 나도 힘들고 룰루도 힘들다는 생각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힘을 줬다. 얼굴에 힘을 주지 않고 최대한 복부 아래쪽에 힘을 주려고 노력했다.

지난 임신기간 숱하게 이미지트레이닝 했던 그 순간.

이 순간을 위해 필라테스로 골반을 유연하게 만들어놨으니, 마음껏 발휘해 보자.


흐으으으읍!

산모님 너무 잘하는데? 한 번 더!!


흐으으으으으으읍!

한 번만 더!!


흐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읍!!!!

응애~~~~




3번의 힘주기 끝에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울러 퍼졌다.


남편은 독기 혹은 오기 가득한 눈으로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비명소리 하나 안 내며 힘주는 내 모습을 보며 진짜 '우와'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밤까지 안 가고 무조건 지금 바로 아기가 나오겠다.'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와 남편은 눈물 흘릴 새도 없이,

우아하진 않지만 우와하게.

벅차고도 아름다운

세상 가장 소중한 룰루와 만나게 되었다.



오후 2시 47분

우리의 우주, 우리의 세상. 룰루와 만남.





("나의 우와한 출산기" 시리즈 마지막 화 "에필로그"가 남아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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