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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샘 Jun 03. 2021

2009 교대생 동맹휴업

우리 세대를 위한 변명


출발은 소문이었다.

4학년 선배들의 임용TO가 수천명 단위로 줄어든다는 이야기가 공기를 차갑게 만든 9월이었다.

총학생회장 출마자가 없어 꾸려진 비대위 대표가 차기 과학생회장 당선자들을 소집했다.


학생회관에 자리잡은 총학생회실에서 현재의 상황을 브리핑했고 어수선하게 모인 무리에게 무거운 과제가 부여되었다고 느껴졌다.


핵심은 간단했다. 당시 정부에서 차기 TO를 줄이기로 결정했고 국립교육기관인 학교측에서는 상황에 대해서 인지한 상태.


교대협에서 늦어도 8월말부터 이에 대해 여러가지 시나리오에 대해서 대응책을 준비했지만 현실적인 대응방안은 전국 교대학생들과 상황을 공유한 후 선명하게 정립할 수 있다고 했다.


일주일의 간격을 두고 교대협, 총학생회, 과학생회 단위에서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했고 나름 잘 준비된 교안까지 배부되었다.


우선 과학생회 집행부가 모였고 다시 학년별로 일정을 잡아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미 결론적으로 동맹휴업이 필요하다고 느낀 상황이었다.


휴업의 논리가 적확한지는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적어도 전국교대생들에게 위기라는 분위기가

전달된 것으로 충분했다.


학내 분위기가 조성된 이후 투쟁위원회를 구성하고 일정을 잡아 휴업 찬반투표에 돌입하기로 했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뽑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체적인 도움은 졸업한 총학생회장 선배로부터 절차적인 문제와 관련해 조언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신분을 정확하게 소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저것 조언 내지는 훈수가 카게무샤를 떠올리게 했다.

-일본의 전국시대에 진짜 군주를 보호하기 위해 가짜 군주인 카게무샤를 내세우고 실제로는 뒤에서 진짜 군주가 움직이는-

찝찝했지만 달리 도움을 받을 구석이 없었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는 경험이 부족한 2학년으로 구성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각 과학생회장이 투쟁위원회를 구성했고 위원장이 이중에 나와야 했지만 안으로는 자기 과를 챙기면서 밖으로는 위원회 전체를 두루 챙기는게 어려웠기 때문에 서로 눈치만 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래서 차기 영어과학생회장 자격으로 위원회에 참석했던 연장자가 위원장을 맡아 과학생회장은 내부에서 정리하기로 하고 부위원장으로는 컴퓨터과에서 자원하여 위원회 구성이 마무리되었다.



https://www.yna.co.kr/view/AKR20090925046000051


투표를 통해 2주간의 동맹휴업이 가결되었고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가능했던 시나리오였다.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 돌발상황의 연속일 줄은 예상할 수 없었다.



우선 동맹휴업 기간 중 실습을 나간 3학년 선배들이 문제였는데 2주간의 동맹휴업의 의미가 실습포기를 전제로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들이 휴업에 동참하지 않았다. 

다른학교와 달리 우리 학교 3학년의 교육실습기간이 동맹휴업기간과 일치하는 바람에 선배들은 학내에서 열리는 관련 활동에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실습을 떠났고 교정에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4학년 선배들과 1,2학년만이 남아 사실상 동맹휴업의 이유와는 가장 먼 사람들만이 휴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우선 동맹휴업은 국립대학교 학생이 정부정책에 항의하기 위한 가장 마지막 방법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2주로 종결되는 동맹휴업은 유급을 전제로 하지 않은 낮은 단계의 항의방법이다.

그냥 학교를 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간 중 일정을 정해 시위나 홍보활동을 펼친다.


지금 같았으면 유튜브 영상을 먼저 찍었을텐데 당시에는 아이폰3G가 갓 보급되어 모바일 생태계가 형성되기 전이었으므로 아날로그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휴업에 동참한 학생들은 강의실 의자와 책상을 뒤로 밀거나 복도에 꺼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투쟁 방법론에 대한 교육이 이어졌다.



정부의 정책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절절하다는 것만으로는 그들을 설득할 수가 없다.

더 높은 차원에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TO 감소뿐만이 아니라 교육예산을 감축한 것이 문제라는 인식이었다.

TO문제에서 출발했지만 교육관련 예산 감소라는 문제에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방향을 갖고 도시철도역을 정해 구역을 맡아서 홍보활동에 나섰다.



지하철역 입구에서 홍보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지만 어떤 역으로 가야할지 수십개의 역 중에

선택하는 회의도 이루어졌다. 환승역이 사람이 많다는 얘기에 주안, 부평과 같은 환승역을 홍보장소로 정하고 날을 정해 하루 종일 거리에서 전단을 돌렸다.



시민들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학생들의 요구에 무심하지도 않았다.

사범대를 다니는 학생이 우리의 전단을 보고 자신들은 단합하지 못해서 임용경쟁률이 치열해졌다며 응원을 하기도 했다.

주안역의 광장이 지금보다 더 넓었을 때, 점심 무렵 시작해 전단을 돌리다

해가 기울어 시계탑의 그림자가 얼굴에 그늘을 만들 때까지 열심히 했다.



핸드백이나 가방을 맨 반대편으로 접근한다. 가급적 상대방의 왼쪽보다는 오른쪽에서, 손에 무언가를 든 사람보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사람이 공략하기 쉽다는 마케팅 기술이 도움이 되는 날이 생길 때도 있구나하며 후배들에게 새삼 일러주었다.



평상시 학교를 다닐 때보다 더 힘들게 9시에 모여 5시까지 2주간 일과를 함께하는 생활은 대학생들에게는 적잖은 부담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 과외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병원에 가야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중에는 물론 그냥 쉬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엔 대표인 나에게 허락을 구하다가 내가 중앙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길어져 문제가 되었다. 고심 끝에 우리 과에서 가장 명망이 있는 형, 누나 3인으로 소위원회를 구성해서 과반수를 얻으면 활동에서 예외가 되는 것으로 제안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이런 판단을 내가 개인적으로 내린다면 부담이 되었기에 책임을 분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여학생들이 위원회의 판단에 섭섭함을 느낀 일들이 적잖이 있었다고 들었다. 어려운 일을 기꺼이 도와준 형, 누나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과천 정부청사 시위(출처:오마이뉴스)



휴업의 하이라이트는 과천 정부청사 앞에서 전국 교대생이 모인 시위였다. 뉴스에서 무슨노총 행사를 많이 봤지만 주인공이 우리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임대한 버스는 넓은 주차장에 차곡차곡 모였고 흙바람 나는 대운동장에도 많은 교대생들이 모였다.



시위는 정부 공무원들이 출근한 금요일 오후에 진행되었고 지방교대생들은 바로 돌아가지 않고 주말간 우리 학교에서 진행되는 대토론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주로 남부지방 교대생들은 희망자가 남았기에 많이 있을 수 없었고 주축은 춘천교대생들이었다.



과천에서 시위가 끝나고 인천에 있는 우리학교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건너오면서 불만이 쏟아졌다.

동맹휴업이 부결된 서울교대가 대토론회 장소 제공까지 불발된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서울교대 총학생회는 학우들을 설득하지 못해 연신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야했다.


과천에서는 교대협 집행부가 정부 관계자를 만나 입장을 주고받았으며 당해 TO 증가와 내년 정책에 반영이라는 아쉬운 결과를 밝혔다. 당해 TO는 많아야 수백명 수준으로 정리되는 모양이었기에 결과를 받아들 일 수 없다는 입장이 대토론회에서 공유되었고 이 결과를 갖고 다시 각 지역으로 돌아가 동맹휴업 연장을 논의하기로 했다.



다시 우리학교에서도 토론회를 준비하기로 했다. 당장 월요일부터 연장투표를 해야하기에 주말간 준비가 필요했다. 찬성과 반대 입장을 균형있게 진행하면서도 학우들 사이에 팩트가 아닌 소문들에 대해 정정하기 위해 사실관계 자료 등을 준비하고 온라인 투표 플랫폼을 도입해서 시험해보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몸과 마음이 고되었기에 휴업을 끝내기를 원했다. 그렇지만 토론회를 준비할 때는 중립으로서 의견을 드러내지 않고 참여하려 했다. 사실 학우들이 유급을 각오할리 없다는 생각으로 큰 부담을 갖지 않고 토론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토론회가 시작되고나서는 남학생들을 중심으로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다. 동맹휴업이 최후의 수단인데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얻으면 안좋은 선례를 남긴다. 유급을 각오하고 휴업 연장을 하자라는 의견이 우세를 보였고, 이에 대해 지친 투쟁위원들이 반대의견을 내면서 공방이 이어졌다.



휴업기간 내내 도움을 주던 선배 졸업생도 의견을 내었다가 무슨 자격으로 토론회에 참석하느냐는 지적을 들을 뿐이었다. 휴업의 명분이 현실적인 이유를 넘어섰고 오히려 토론회를 통해 휴업 연장 의견이 공감대를 얻었다. 투표결과는 찬성의견이 과반을 넘어섰다.



이 결과에 대해 실망한 것은 우리였다. 2주간의 동맹휴업은 사실 학교측과 어느정도 약속된 시나리오가 있었다. 학교측도 학생들의 취업문제에 예민할 수밖에 없으므로 2주 동맹휴업을 통해 정부에 압박하는 정도는 서로 주고 받는 게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4주 동맹휴업으로 진행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집단 유급을 주도한 지도부 측에 업무방해 등 각종 소송의 위험이 따른다. 경찰 등 치안력이 동원된다는 소문도 있고,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이기에 두려움이 커졌다.


더욱이 총장님이 교육부에서 계속 전화로 압박을 받는다며 학교 측 관계자들도 난처해했다. 2주 휴업은 사후협상을 통해 수업을 연기하는 방식으로 메꿀 수 있지만 4주 휴업은 협상여지가 없고 투쟁위원 등 지도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식으로 회유했다.



사실 투쟁위원들도 학교생활 재밌게 하고 싶어서 학생회 활동에 참여한거지 유급을 걸고 학생운동하려고 한게 아니기에 정작 의사와는 상관없이 휴업 연장이 진행되는 상황에 당혹스러워했다.



결국 화요일에 학생총회를 소집했다. 학생총회는 대의원회의와 달리 일정 수 이상 학생이 모이면 학생총의로 규정하는 형식으로 당시 과학생회가 구성되기 전이고 3학년들이 실습간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결정 방법이었다. 그런 결과로 사안의 심각성을 다시 공유한 뒤에 학생총회에서는 휴업 연장 기준을 80%이상의 찬성으로 정하기로 하여 수요일 토론회 후 다시 투표를 진행하기로 했으며 이어진 재투표에서 휴업연장 부결로 결론을 내림으로써 동맹휴업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지방교대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는지 휴업연장 논의를 이어가다 우리 학교 결과를 보고 휴업을 끝내는 움직임을 보였다. 서울교대가 일찍 이탈한 상황에서 우리학교가 전체 흐름을 주도하는 상황이었기에 때문이다.



휴업 준비부터 종결까지 몸도 마음도 지친 4주였다. 와중에 가장 마음이 상한 일은 교대협에서 미납분담금을 요구한 일이었다. 각 교대에서는 교대협 분담금이라는 이름으로 일정액을 모아서 협의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대마다 분담금을 제때 내기도 하고 안내기도 하면서 재정에 구멍이 생기는 일이 있었고 더욱이 동맹휴업 기간 중 지출이 많아지면서 과거 미납 분담금을 우리에게 요구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분담금은 과학생회마다 20만원 정도가 책정되었고 선배들이 학생회를 운영하면서 미납한 금액이기에 4학년 선배들이 1인당 5,000원 정도를 납부해야 했다. 공부하느라 바쁜 선배들에게 민폐는 아닐까 생각이 안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선배들의 TO문제로 후배들이 뼈빠지게 투쟁한 걸 생각하면 기꺼이 그들이 돈을 낼 거라 믿었다.


4학년 과대표에게 이 상황을 설명하고 일주일을 기다렸으나 반응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 실망스러웠다. 도서관에서 다시 4학년 과대표와 이 문제를 이야기하는 중 문제를 눈치챈 선배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4학년이지만 학번이 더 높은 선배였는데 보통 남자 교대생들은 졸업 후 군대를 가는 경우가 많으므로 해당 학년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축에 속했다. 


그의 해답은 이러했다. 선배들에게는 절대 돈을 받을 수 없을거다. 자기가 몇명에게 분담금을 걷어줄 수 있다. 그렇게 분담금 30,000원 정도를 받을 수 있었으며 상황을 이해하기에 작게 감사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선배들에게 엄청난 실망이 앞섰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들이 보는 임용시험 TO 늘린다고 후배들이 그렇게 고생했는데 이런 반응이라는게 납득할 수 없었다. 분담금은 결국 총무가 우선 개인돈으로 납부하고 학생회비에서 회계처리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후배들은 선배들의 분담금 몫까지 두번내는 꼴이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상황이 이러한데 선배들도 나름대로 분담금 요구건에 대해 마음이 상했는지 정기 총회에서 학생회를 정식인준하는 자리에서 행사 진행이 미숙하다며 인준거부 표를 무더기로 행사했다. 다행히 인준에 필요한 표는 획득할 수 있었지만 서로간의 불신은 커졌다. 사실 인준거부표가 4학년이 행사한 표라는 증거는 없었지만 보통 정기 총회에 4학년 선배들이 자 참여하지 않는 전례를 깨고 여러 명이 참석했기 때문에 그런 심증을 가진 것 같다.



그래서 이때의 악감정으로 4학년 선배들에게 임용선물을 학생회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는 하지 않기로 계획했는데 하필 친한 4학년 선배가 페레로 로쉐를 사달라고 해서 도서관에 몰래 전달한 것을 전 학생회장에게 들키는 바람에 경우가 없다며 혼난 일이 있었다. 학생회장 간에 임용선물을 해주는 관례를 깨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선배의 남자친구가 나에게 찾아와서 대화를 요청했고 선물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선배라는 집단에는 악감정이 있지만 전 학생회장 선배에게 개인적인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고 또 어차피 안볼사람 잘해주자는 주의라서 그렇게 정리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1학년 집행부 후배들 중에 동맹휴업 중 사이가 틀어져서 파벌이 생기는 바람에 집행부 탈퇴를 원한 후배들이 인준거부표를 행사했다는 내막을 알게 되었다.



당시 학생회 총무를 맡았던 친구의 말을 빌리면 "집행부가 술마시고 노는 것인줄 알고 힘든일 도맡아서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데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힘들게 인준이 끝나고 당분간은 조용하겠지 싶었던 그때 내가 좋아하던 여자 후배가 밥을 먹자며 연락을 해왔고 가벼운 의미로 만나서 집행부를 집단 탈퇴하겠다는 선언을 아무런 내막없이 들었던 내게 큰 충격이 다가왔다.



이 일을 다시 동기들과 회의해야 했고 결론적으로 학생회 인준이 끝난 상황에서 집단 탈퇴한다는 것을 받아들 일 수 없고 여자 동기들 사이에서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의견이 우세하여 탈퇴를 거부하는 것으로 통보했다.



지나간 일이지만 마음이 떠난 사람을 잡는다는게 무의미한 일임을 알고 대학생활 중 했던 여러 실수 중에 가장 큰 실수가 아니었나 싶다. 과 행사마다 하기 싫어하는 표정으로 참여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미안하면서도. 안좋은 결론에 이르게 된 동맹휴업이라는 상황을 증오하면서도.



또한 후배들의 집행부 탈퇴는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 동기가 약 한달 뒤 자신의 집안 사정이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집행부 탈퇴를 요구했을 때 모질게 말할 수 밖에 없었을 때도



잃어버린 4주라는 생각을 하면서 학점은 잃고 싶지 않아 이 때 오히려 시험공부를 제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았다. 휴업이 끝나고도 사후처리를 위해서 교대협 회의에 다녀오고 전주에서 새벽버스를 타고 7시 55분에 인천터미널에 도착하는 버스를 타고 9시 수업에 출석하며 코피를 쏟았다.



하지만 내가 책임을 다한 것과 별개로 휴업이 일으킨 인간관계의 균열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그 속에서도 내가 값지게 얻은 교훈은 극단을 추구한다는 것 뒤에는 극단에 치닿지 않도록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급을 각오하고 휴업 연장을 결의한 학우들 뒤에서 집단 유급이라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교수님들이나 학생처 직원들이 고민하는 모습에 나를 비추어보면서.

위험한 곳을 과감하게 뛰어드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다. 뛰어들고 싶은 유혹이 강렬한 것을 외면하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것도 용기다. (미생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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