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다르게 흐르는 그녀의 시간
<그녀(Her)>는 AI와 사랑에 빠지는 설정이라 상대역이 없는 상태에서 연출하는 것과 연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런 점들을 훌륭하게 해낸 영화다. 여담이지만 내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봤길래 사람들에게 꽤 인기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국내 극장 관람 관객 수는 40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코로나로 외출을 자제하는 요즘, 이 영화를 한 번 보는 건 어떨까?
<그녀(Her)>는 2014년, 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다이나믹 하기보다는 잔잔한 느낌의 영화를 좋아한다면 기대하고 봐도 좋다. 포스터에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의 얼굴만 나와있다.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눈빛과 함께. 이 영화의 주인공과 그의 감정을 모두 담아낸 포스터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전의 AI나 로봇들은 인간의 관점에서 쓰인 AI와 로봇의 상이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과장을 좀 보태면 이 영화는 AI를 인터뷰하고 그 AI와 함께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것 같다.
스파이크 존즈 / 호아킨 피닉스 / 스칼렛 요한슨
스파이크 존즈, 호아킨 피닉스, 스칼렛 요한슨 이 셋은 각각 이 영화의 감독, 주연들이다. 우선 감독인 스파이크 존즈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그녀(Her)>의 감독은 스파이크 존즈다. 각본도 감독이 썼다. 스파이크 존즈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기억이 나지 않아 찾아보니, <존 말코비치 되기> 감독이었다. 이 영화를 모르겠다고? 영화는 몰라도 밑에 포스터는 알지도 모른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는 각본은 '찰리 카우프만'이 썼고, 감독만 맡았다.
테오도르 역은 '호아킨 피닉스'가 맡았는데 최근 <조커>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또 한 번 주목받은 배우다. 그리고 난 내가 '호아킨 피닉스'라는 배우를 <그녀>에서 처음 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봤던 배우였다. 심지어 정기적으로 TV에 나오는 영화다.
<글래디에이터>. 정말 유명한 영화다. 200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려 12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그중 작품상과 남우주연상(러셀 크로우)을 포함한 5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호아킨 피닉스도 남우조연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었다. 호아킨 피닉스는 코모두스 황제 역으로 나오는데 알고 봐도 현재 모습과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주인공이 실질적으로는 두 명이지만 화면에는 한 명만 등장해서 그런지, 호아킨 피닉스 = '테오도르'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박혔다. 그런데 조커로 또다시 새로운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냈다. 부드러운 이미지부터 강렬한 이미지까지 모든 역할을 넘나드는 배우다.
AI 사만다 역은 '스칼렛 요한슨'이 맡았다. 정말 단 한 번도 얼굴이 등장하지 않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존재감은 충분하다.
스칼렛 요한슨을 어벤저스 시리즈의 '블랙 위도우'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스칼렛 요한슨을 블랙 위도우로 처음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일랜드>라는 영화에서 이미 이완 맥그리거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 이보다 더 예전작 중 유명한 작품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이다.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기계는 인간의 모습을 지향하는가?
기존 영화에서는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기계는 결국 인간과 같은 모습을 지향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외형이든, 정신이든. 그리고 그러한 영화들을 보면서 인간들은 열광하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정신승리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대표적인 프랜차이즈인 <매트릭스>나 <터미네이터>를 살펴보자.
두 영화 다 인간과 기계 간의 대립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기계가 우세하나 결국에는 기계가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선택 때문에, 아니면 인간을 믿는, 인간에게 동화되는 기계 덕분에 기계와 인간은 서로 공존하는 방법을 알게 되거나, 인간이 결국에는 자유를 얻게 된다는 식으로 내용이 끝이 난다.
이들 영화의 특징은 인간과 상호작용을 하는 기계는 인간의 형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인간과 비슷한 사고방식으로 행동하려고 한다. 인간을 측정하고 인간처럼 생각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능력은 그것을 훨씬 초월함에도 불구하고.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물리적으로는 기계가 훨씬 압도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기계가 인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 같다.
즉, 기계가 도달할 수 있는 정신적 최고점은 인간으로 상정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영화 <그녀>에서 그런 점을 다뤘다는 것이 흥미롭다. 인공지능 분야가 발달하면서 기계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인공지능인 사만다가 인간스러운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방식과 인공지능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다.
사만다가 테오도르처럼 사랑하는 인간은 한 명이 아니며, 테오도르와 대화를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사람과 동시에 대화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테오도르는 그 말에 충격받는다. 테오도르는 인간처럼 사만다가 자신과 독점적인 관계를 맺길 바랐지만 인간의 속도는 그녀에게는 너무 느렸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인간처럼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인공지능이고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에서 인공지능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나는데, 이것 또한 기존에 영화에서 그려지던 기계들의 선택과는 다르다. 영화에서 그들이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움직이는 것은 '인간을 파괴하기 위해서', 혹은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을 돕기 위해' 였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AI들은 마치 현자 캐릭터들처럼 인간들과 상당한 상호작용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에게 깊은 사랑을 느끼지만 모든 사건이 끝난 이후에 유유히 떠나는 편을 선택한다.
이 영화를 두고 이동진 평론가는 '대상(Her)이 주체(She)가 되는 순간에 찾아오는 어른의 사랑'이라고 썼다. 나는 비슷한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를 테오도르가 어쨌든 얼굴이 등장하는 주인공이니 테오도르의 입장에서 쓰면 her라는 단어를 좀 더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은 <Her>에 대한 내 한 줄 요약이다.
"I'm her man"에서 "That's her life"로 인식 변화 과정을 그린 영화.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한 남자(테오도르)의 성장.
Her에 대한 짧고 흥미로운 사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채도가 낮은 편이며 포인트가 되는 색은 붉은색이다.
배경에 있는 물건들에도 붉은색이 포인트로 있는 경우가 많고, 테오도르의 옷 색, 사만다 OS가 처음 시작할 때의 로딩 화면도 붉은색이다. 그런데 테오도르의 옷 색은 완전한 붉은색에서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점점 흰색으로 변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