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치 않은 간단한 자기소개
"안녕하세요.
저는 그림 그리고 음악 만드는 사람이고요.
영화와 글쓰기를 좋아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나를 소개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 곳에 오게 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내겐 몇 달간 혼자 끄적이다 멈춰 버린 글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 글을 어디로든 한번 데려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이 시나리오 글쓰기 워크숍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이 사연을 꺼낼 순 없었다.
이미 영화와 글쓰기, 어느 것 하나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스터리한데,
여기에 또 다른 글쓰기 이야기까지 끌어 온다면,
그 시간은 '자기소개'가 아닌 '혼란소개' 시간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소개를 들은 강사가 물었다.
"쓰신 시나리오로 영화 제작까지 생각하고 계신지요?"
그의 물음에 나는 답했다.
"그럼 좋죠. 처음부터 원대한 뜻을 품고 수강 신청을 한 건 아니었지만,
저는 어떤일이든 거시적인 관점으로 조망하는 걸 선호해서요.
이 시간이 제가 영화계로 입문하는 시발점이 되면 좋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득 내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거시적인 관점... 영화계의 시발점...이라... 허허... 거창하다 거창해.
그냥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고 말하면 될 것을... "
마치 녹음기에 녹음된 내 목소리를 다시 듣는 것 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술' '음악' '미술'
그 단어들을 입에 올리는 일은 늘 어색하다.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든다고 나를 소개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어떤 말도 온전히 나를 설명하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그것들을 빼고 나면 나에게 붙일 수 있는 수식어가 남지 않는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도 괴리감 없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지금의 나를 온전히 설명하는 단어는 무엇일까?"
'-하였다. -하고 있다. -할 것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설명하는 동사들 사이에서도 어딘가 미묘한 어긋남이 느껴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생각만 멈췄고,
그저 정체된 느낌만 남았다.
자정을 향한 시각, 차가운 겨울 밤의 도보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괜실히 발걸음을 더 재촉하고 팔도 앞뒤로 더 새차게 흔들었다.
콧 속으로 찬 공기가 더 깊게 들어왔다,
그러자 늘 내 안에 있던 어떤 것이 또 다시 건드려졌다.
오랫동안 빠져나가지 못 한 채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무언가.
어쩌면 이 감각이 나를 온전히 말해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 해 왔고 오랫동안 내가 벗어나려 애써 왔던...지금의 ‘정체’된 상태가..
나의 말과 글이 정체되어 정체성이 정체된 것일까?
아니면 나의 정체된 정체성 때문에 말과 글이 정체된 것일까?
아무래도 정체의 실체를 밝히는 것 또한 정체 된 것 같다.
만물은 흐르지 않으면 썩는데...
혹시 나도 썩어가고 있는건가?
도통 내가 무슨 상황인건지 아무래도 그 또한 파악이 안되는거 같다.
그럼에도 지금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면
나는 정체되지 않고 흐르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정체된 상태를 정체된 글에 담아 흘려보내 보기로 했다.
열로 열을 다스리는 이열치열처럼
정체된 글쓰기 이야기로 글쓰기와 정체된 상태를 풀어 보는...
일종의 이글치글 방식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