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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Him Sep 03. 2021

10. 인생이 늘 앞뒤가 맞는 건 아니더라

사라진 것들



열이 심각하게 났을 때는

단순히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 열이 가라앉고 식을 때쯤

나의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입원한 그날부터

내 몸은 롤러코스터 같았다.


아프다가 안 아프다가 죽을 만큼 아프다가 또 괜찮아지고를 반복하였다.


솔직히 말하면 많은 아픔들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수많은 아픔들이 찾아왔고

제 각각의 무기들을 가지고 내 몸에 덤비는 느낌이 강할 만큼

어느 하나 쉬운 통증들은 없었다.

얼마나 아팠는지 주변의 통증에 비유를 하고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았을 때 마땅히 떠오르는 비유 대상은 없었다.

내가 겪은 아픔 중의 최고는 절대 아니었지만

내 몸이 열이 오르고 신체적 변화가 찾아올 때마다

나를 뒤덮은 불안함이 사실 더욱 무서웠다.


피부색이 변하고 입술은 사막처럼 건조했다.

성격이 급한 나는 몸이 회복되는 시간을 기다리기 힘들었고

신체 리듬이 조금 회복된다 하더라도 독한 항암약에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사실 그런 나를 보고 있는 게 더 큰 고통의 시간들이었다.


입원 첫날 19층 혈액암 환자들이 모인 그곳에 내 또래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내 또래는 처음 보는 상황이었고 나만 이런 아픔을 겪는다고 생각하였는데

내 예상과는 달리 나보다 더 아픈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보다 먼저 이 고통의 길을 걸었던 친구는

2년간 치료를 받은 상태였고 현재도 계속 치료 중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확실히 이 병의 대해 아는 것이 많았고 교수님의 진료 스타일과 병원들 간의 특성까지

백혈병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하였다.

처음 이곳을 온 엄마와 나에게 백세모라는 네이버 밴드를 알려주면서

이 병이 얼마나 지독한 병인지

이 병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항상 처음이 기대되는 순간들이 대부분이지만

이곳의 시작은 기대되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 앞길을 장담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뭔가 앞뒤가 잘 맞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들 한 번씩 한다는 재수 생활 없이 대학교를 들어가고

남자들이라면 걱정하던 군대도 나름 잘 다녀왔다.

그 군대에서 제대하기 전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청춘의 불을 켜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내 인생의 계획표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이 고통 속에 살았던 친구는

인생의 계획이 오로지 생존뿐이었다.


앞으로 나의 생활도 병을 이겨내는 시간들로 모든 것이 바뀔 것이며

온전히 내게 주어진 시간들의 즐겼던 휴식보다는

아픔을 느끼며 순간순간들을 원망하는 시간들이 많아질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온전한 내 시간을 부여받는 날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

병원에서는 세상과 단절된 채 몸과 마음이 약해진 나를 만나 볼 수 있는 시간들이 많았다.


나는 그런 시간들이 정신적 성숙보다는 정신적 고통에 가까웠다.


내 병원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의 노력들이 나를 환자의 굴레에서 빼주는 느낌이었지만

사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뒤가 무서웠다.


좋은 꿈을 꾸고 난 뒤 행복함은

깨고 난 뒤 던져진 내 현실에 너무나 빨리 사라졌다.


모든 것은 지금의 내가 어떤 상황인지가 제일 중요하였다.


그리고 서서히 내게서

많은 것들이 차가워지고 사라지는 중이었다.


나에게서 제일 먼저 사라진 것은 스스로 건강했다는 믿음과

살아가면서 수많은 역경에 부딪힐 때마다 느꼈던 할 수 있다는 자신감들


"내가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서 나오는 나약함은

도전과 젊음의 중심에 서있던 성취의 장벽을 무너뜨리기엔 충분했다.


예전부터 삶의 재미는 역설적이게도 어려움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백혈병을 이겨낸 순간 또 다른 나의 삶이 열리고

느끼지 못하였던 삶의 재미들을 마주하겠지만

사실 그 뒤에 찾아오는 어려움들은 내가 이겨낼 수 있을까 싶다


" 백혈병도 이겨낸 놈이 뭘 못하겠냐"


내게 많은 사람들이 던져준 위로였다.

사실 맞는 말이다. 남들이 못 겪어본 고통으로 인해 나의 고통의 역치는 커졌고

쉽게 어려움이라고 생각이 안들만큼 난 성숙해져 있을 수도 있지만


여전히 나는 두려웠다.

백혈병을 이겨낸 후 얻은 성취감보단

백혈병으로 잃어버린 것들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남들처럼 살 수는 있겠지만

난 더 이상 남들과 같은 세상을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인생에 주어진 큰 장애물들을 이겨내 본 사람들처럼

또 한 번 그 장애물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방법을 얻기보다는

힘들어진 육체와 정신만 남아 결국 지쳐 쓰러지게 될 것 같았다.


매년 새해에 다이어리에 쓰던 스케줄표처럼

지웠다 다시 쓸 수 있는 계획들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인생의 잘 맞춰진 계획들이 무너지니

다시 어디서부터 쓰고 세워야 할지 막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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