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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Him Aug 12. 2021

9. 가장 치열하게 살고 싶을 때

사라진 것들

난생처음 맞아보는 주황색 항암약이

내 혈관을 타고 들어갈 때

지금의 내 모습이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저 내 몸속에서 쌓여있는 모든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들어가는 항암약이지만


내 인생의 많은 것들이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많은 것이 없어도

인생은 꽤 살만하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나 보다.


그저 치열하게 살고만 싶었다.

남들처럼





항암을 하기 전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매일 아침 6시 엑스레이를 찍으러 내려가고

매번 3번씩 채혈을 하였으며

항암약이 혈관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히크만을 삽입하여

내 왼팔엔 주렁주렁  병원용 액세서리들이 걸렸다.


살면서 내 혈관에 이리 많은 바늘이 들어가는데

안 찢어지고 버텨주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항암 전 가장 하기 싫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그나마 제일 길었던 머리를 이발하고 

바닥에 떨어진 내 머리카락을 구경하며

항암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가 되었다.


난 백혈병 치료 중

가장 잃어버리기 싫은 놈이 내 머리카락이었다.

어쩌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난 뒤여서

남은 몇몇 중의 가장 귀중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이발을 하는 순간

일반인과 환자로 구분되는 것도 싫었고

전역할 때까지 이쁘게 길러 놓은 머리카락을 떠나보내기 싫었다.


또한, 거울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오묘한 느낌이 었다. 생각보다 시원하고 잘 어울리는 잠깐의 순간과

이 모습으로 어떻게 걸어 다니지 하는 고뇌의 순간이

섞이고 그중에서 더 슬픈 생각이 강하게 작용하는 순간

확실히 삭발한 모습이 너무 흉악해지는 그 느낌


예전 사진들을 보면 머리카락을 갖춘 모습만으로도

너무 돌아가고 싶었다.


난 부랴부랴 인터넷으로 가발과 모자를 찾기 시작하였다

여러 사진들을 보며 가발과 모자를 장바구니에 담았지만

비싼 가발조차 내 부끄러움을 덮어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항암이 끝나고도 3일이 지났을 무렵

그나마 조금이라도 자란 머리카락이

자고 일어난 베개 위에 밤톨 가시처럼 박혀있었다.


이렇게 빨리 머리카락이 빠질 줄을 몰랐는데 

꼭 내가 서서히 죽어가는 기분이었다.


치료가 곧 끝날 거라는 근거 없는 긍정이 스며들기도 전에

부정은 너무나 빨리 날 찾아왔다.


내 모습으로 돌아가기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지나면 별거 아니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베개 위에 덮인 검은 내 머리카락처럼

내 마음 위 검은 생각들이 드리웠다.


거짓말처럼 몸의 기운은 사라졌고

이제는 재밌어하던 병문안조차 너무 귀찮아졌다.


사실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빠지자마자

거짓말처럼 약해지는 내 몸은

감염에 취약해져 고열과 두통을 동반했다.


그러다 난생처음 화장실에서 기절하였다.


나도 모르게 쓰러졌고

쓰러지면서 쿵 하는 소리에

내 앞에 계셨던 환자분이 비상벨을 눌러주셨고

수많은 간호사분들이 화장실로 달려오셨다.


괜찮다는 말과 함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넘어지면서 몸도 아팠지만

내 몸 하나 간수 못하는

부끄러움과 느껴지는

무력함에 마음이 더 아팠다.


결국 화장실에서 옷을 다 입은 채 문을 열었다.


그때도 내 몸은 38도 밑으로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손을 계속 씻 감염을 예방하라는 말에

내 손에서 물비누 냄새가

빠지지 않을 만큼 손을 씻었다.


씻은 손은 부르터지며

목욕탕에서 오래 있으면

변하는 쭈글거리는 거북손이 되었다.


건강했던 내 모습은

서서히 무너져갔다.


이상하게도 건강했을 때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는데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니

치열하게 살고 싶어 졌다.


처음으로 기운을 잃고 쓰러진 날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수면제 2알을 처방받아도 

스며드는 잡생각들이 수면을 방해했다.


가장 깊고 강하게 드는 생각은

볼품없던 내 인생의 과거들이었다.


빡빡이가 된 지금 와서 

이런 생각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하겠지만 

오랜만에 핸드폰에 의지하지 않은 채 

온전히 내가 살아온 시간들을 돌이켜볼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 흘러갔다.


후회되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겹쳐졌지만 

결국 내 머릿속에 자리 잡은 건 

후회되는 그때 그 순간들이었다.


지금까지의 삶은 볼품없었으니 남은 내 삶은 가치를 더하고 싶어 졌다.


항암으로 내 몸은 많이 망가졌으나

살고 싶다는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


지금까지의 후회의 삶을 모두 죽이고

다시 태어나고 싶어 졌다.


항암치료는 너무나 힘든 고통을 주었으나

그 고통이 끝난 뒤 내 속에서 느껴지는

과거를 죽이고 새로 살아보자는 

삶에 대한 열망은 내게 희망적으로 다가왔다.


머리도 다시 자랄 거고 나도 다시 건강해질 거고 

지금까지의 삶을 잘못 살았기에 받는 벌이라 생각하며 

달게 받고 새로 살아야겠다 싶었다.


나에게 왜 찾아왔는지도 모르는 

죽일 놈의 백혈병이 

내가 잘못 살아서 온 병이라 느껴지는 순간 

인생에 대한 반성과 함께 끝이 날 것 같은 느낌이

항암을 갓 시작한 병아리 환자에게 느껴졌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내 인생은 너무 막막하고 

앞이 안 보여 어쩔 줄 모를 때 어떻게든 흘러갔다.


그게 누군가의 힘이었든 

나의 운명이었든

결국 내 인생이니깐

이번에도 어떻게든 흘러갈 것이다.


누구나 힘든 순간은 있고 

누구에게나 그 순간은 지나간다

비록 긴 싸움이지만 

내게 이 순간도 지나갈 것이다.


어차피 벌어진 일 

내 잘못이라 생각하고

부디 빠르게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내 잘못이라 받아들이기까지 

나 스스로를 찌르며 

후회되던 나의 잘못들까지 파고들었지만 

백혈병이 찾아온 정당성을 찾아야 했었다.

억울해 죽는 편보단 

내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나 스스로에게 용서받고 새로 시작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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