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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Him Oct 21. 2022

18. 독서하는 삶

사라지고 남은 것들


병원에서 수많은 책을 읽었다.

책을 읽어야 그나마 무거운 현실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 달 안에 몇 권 읽기" 나에게는 가장 위험한 독서법이었다.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내용보다는 책의 표지가 주는 느낌들이 기억에 많이 남았다. 속독하는 능력이 없기에 눈에 들어오지 않은 단어들과 문장들이 많았으며, 별 내용은 당연히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생략하고 넘어가기 일수였다. 즉 책의 알짜배기를 항상 놓친 채 책을 다 읽은 듯한 기분은 나 스스로에게 열심히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최면이었다. 독서마저 하나의 숙제로 생각하며 밀려있던 인생의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그러므로 분명히 읽은 책이었지만 다시 한번 읽었던 책을 다시 읽거나 누군가가 읽었던 책의 대한 내용을 물을 때 바로 떠오르지 않았으며, 심지어 책 제목도 떠오르지 않은 적도 있었다.


여유롭게 읽어도 되는 책들을 내 인생처럼 바쁘게 읽어버렸다.


항상 무엇에 쫓기듯이 살았다. 책은 통학하던 대학교 시절 지하철 속에서 읽었던 것이 전부였으며, 서점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왜 이 시간에 이곳에 있을까 의문이 많았다. 지금 와서 생각하지만 난 그들을 보며 느끼는 것이 많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항상 꽉 차 있던 강남역 교보문고는 내게는 약속 장소였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의 휴식처였다.


휴식과 안정이 필수인 병원에서 조차 난 내 삶에 휴식을 줄 수 없었다. 대상은 없지만 뒤쳐지는 시간들이 싫었으며, 무균실에서 토익 공부라도 해야 이상한 마음의 안정이 생겼다. 당장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 암환자가 토익공부를 하며 희망을 가지는 모습일 거라 생각하지만 암에 걸렸음에도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지 못한 어리석은 모습에 가까웠다.


최선을 다하는 것과 어리석은 것은 한 끗 차이였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뿌듯한 느낌과 노력할수록 더욱 내 삶을 옥죄여오는 느낌 난 이 두 가지 느낌이 항상 오묘하게 오고 갔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생 때만이 할 수 있는 유럽여행도 돈이 없다는 핑계로 하지 않았으며, 알바를 2개씩 하며 바쁘게 살았지만 그렇다고 돈을 많이 모은 것도 아니었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항상 무언가에 다가가는 느낌보다는 쫓아가기 바빴으며, 쓸데없는 자격지심에 인정하는 법도 배우지 못하였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사는 삶보다는 어리석었던 삶의 태도에 결과물은 내 건강을 잃은 것이 아닐까 속상했었다.   


답답한 마음에 처음으로 남 눈치 안보며 큰소리로 울어봤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울고 나니 내 호흡의 집중이 되고 감정들이 많이 정리되었다.

울고 나니 내 현실과 내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주삿바늘이 꽂힌 팔, 병원 옷, 병문안 때 받았던 책들, 그리고 긴 싸움이 될 것 같은 나의 투병 내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한다고 해서 바뀔 것들이 없어 보였다.


지금 당장은 그 무엇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 줄 수 없을 것 같다.

내 현실이 무거울수록 시야는 많이 좁아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사라졌다. 그럴수록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기고 그 압박감은 내 인생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한 번뿐인 인생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살았는지 후회도 밀려오지만 지금이라도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였다.


병문안 와준 친구들이 사줬던 책 한 권을 펼쳐 읽으며 비어져 있는 마음 한 구석을 채워 넣었다.

내 인생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던 책이었지만, 내 불쌍한 인생을 참 많이 위로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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