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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Him Oct 23. 2022

19. 내 인생의 봄

사라지고 남은 것들

가끔 이 정도면 행복한 인생이라 느끼고

바라는 게 많이 없어진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행복의 꽃을 피우듯이

날씨마저 좋았던 그때가 내 인생의 봄이었다.



비가 온 뒤 내 마음이 많이 굳었다


나의 투병생활을 어느 정도 나의 삶 속에 녹이고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며, 무엇도 바라지 않고 많은 시간을 흘러 보냈다. 어느 정도 머리도 자라고 남이 볼 땐 환자인 줄 모를 만큼 건강해졌으며, 나의 항암치료들도 많이 끝나가고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니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시간이 흘러 상처 위 딱쟁이 진 마음 한쪽 부분이 단단해졌다.

웃으면서 내 상황을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퍼져간 나의 백혈병 소식을 신경 쓰게 되지도 않았다. 남이 건드리지 않았다면 감정의 동요가 거의 없는 무감정의 상태였다.


그렇게 이겨내는 것 같았다.


19년 12월 날씨가 많이 추운 날 처음으로 남 앞에서 내 백혈병 이야기를 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백혈병 협회에서 주최한 투병 상담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백혈병에 관한 정보들을 얻고 투병생활의 노하우를 듣는 시간이었다. 대략 10명 정도 모였으며, 그날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혈병 환자의 가족들이었다.

짧은 자기소개 시간을 가진 뒤 이후 의료진들과 상담시간을 가진다는 안내와 함께 한 명씩 차례대로 자기소개를 시작하였다. 그렇게 자신의 아들, 딸들이 어떤 백혈병에 걸렸으며, 어떤 힘든 점들을 가져가고 있어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였다.


그때 한 어머님이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시작하시며 눈물을 보이셨다.

감히 위로드릴 수 없는 어머님의 말들이 전달될 때 굳어있던 내 감정들이 쏟아졌다. 어느새 내 눈가에도 진한 눈물이 맺혔다. 그렇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보이신 어머님은 말을 잇지 못하셨으며, 잠시의 시간을 가진 뒤 이야기를 끝맺으셨다.


다들 남일 같지 않은 어머님의 이야기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다음 차례인 난 어떻게 걸리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내 백혈병 이야기를 처음으로 전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26살 백혈병 환자입니다.

난 인사말과 동시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으며,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던 내 감정들이 요동쳤다. 남 이야기를 듣다가 내 이야기를 전달하려니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솔직히 서럽게 운 거 빼고는 어떤 이야기를 전달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과 비슷한 아픔들의 같이 슬퍼하고 힘내라는 따뜻한 위로를 전달했던 그 순간들이 추운 겨울날을 그나마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곳 모두가 혼자서는 못 이겨낼 아픔들을 혼자서 짊어지고 있었으며, 무뎌진 감정들은 무거운 현실 뒤에 숨기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 내 또래로 보이던 한 남자분이 내게 말을 거셨다.


" 저도 비슷한 나이대에 백혈병에 걸렸는데 이야기하시는 거 듣고 저도 같이 울었어요"


그냥 혼자 울고 끝난 창피한 순간이었는 줄 알았으나, 나도 누군가의 굳어진 감정을 쏟아지게 해 줬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었고 나의 아픔을 남에게 보여 줄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이

어쩌면 잠시 굳어져 있던 나라는 사람을 부끄럽지 않게 해 주었다.  

 

그렇게 난 나의 아팠던 26살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다시 올 인생의 봄을 기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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