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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n Him Oct 27. 2022

20. 사라지고 남은 것들

사라지고 남은 것들



많은 것들을 놓치고 살았지만

내게 남겨진 것들은 항상 있었다.



19년 6월 12일 백혈병에 걸린 뒤 3년이 흘렀다.

가장 불행했던 그날들도 이제는 지나간 일들이 되었으며, 나의 20대를 돌아볼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추억거리가 되어버렸다. 난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해 그날의 나로 돌아가 투병일기를 기록하였다. 백혈병에 걸린 것도 희박한 확률이었지만 지금 노트북 앞에서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나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던 그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또한,

"그 많은 고통들을 이겨내고 내가 얻은 것을 무엇이고 내게서 사라진 것들은 무엇일까?"


고난은 나보다 더 강하다      


내가 고통 가운데서 몸부림칠 때, 내 주변 모든 이가 마음 아파하고 위로를 전해주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 따스함을 모른 채 절망하고 홀로 낙심하였다.


내가 똑바로 서지 못하니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인생의 파도는 내게서 많은 것들을 휩쓸어 갔다.

영원히 건강할 줄 알았던 내 모습과, 열심히 미래를 위해 모았던 돈과 생각들 심지어 긍정적이었던 나 자신조차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무너져있었다.


인생을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이 들었다. 처음부터 4기로 시작하는 지독한 혈액암은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 앞으로의 인생이 그려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는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넸지만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며, 결국 나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다.

내게서 지난 많은 일들도 생각해보면 저절로 시간이 흐르면서 해결된 일보다는 내가 견디고 버티며 지나간 일들이 대부분이고 나도 모르는 부분에서 알게 모르게 나를 위해 도움을 준 손길들로 인해 무사히 이겨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며 기도하였다.

출구 없는 미로를 만났을 때 답답함에 소리 지를 수 있는 데는 오직 하늘뿐이었다.


백혈병 걸리기 1주일 전에 몇 년 만의 친구의 부탁으로 교회를 갔었다. 무신론자에 가까웠던 나에게 교회는 그저 장소의 개념일 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살지는 않았다. 그래도 로마에 갔으면 로마법을 따르고 싶었던 난 교회를 간 김에 감사헌금을 처음으로 드렸다.


그리고 아주 감사하게도 일주일 뒤에 난 백혈병에 걸렸다.

나를 교회로 이끈 친구에게 백혈병 사실을 전하면서도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냐며 교회에 가서 헌금까지 한 나의 억울함을 전달하였고, 앞으로 평생 내 인생의 교회는 없을 줄 알았다.


나의 병문안 첫 선물은 성경책이었다.  


대학교 시절 친했던 형에게 내 백혈병 사실을 조심스럽게 알렸으며, 형은 나와 친했던 선배들을 꾸려 나의 병문안을 와주었다. 이 중 한 선배는 조심스레 내게 어떤 선물을 줄까 고민하였다가 무언가에 이끌려 서점에서 성경책을 골랐다는 얘기와 함께 내게 성경책을 전달하였다. 몇 년 만의 만난 선배가 전한 선물은 나도 모르게 미워하고 있었던 교회에 대한 내 마음을 녹이기 충분하였으나, 절대 성경은 읽지 않았다.


나는 점점 약해져 갔다


스스로가 많이 약해져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많이 의존하고 기대게 된다. 환자들은 의사를 신뢰하고 스스로 할 수 없는 부분들은 가족들에게 의지하며 투병생활을 이어간다. 나도 항암치료에 들어서는 몸과 정신이 많이 약해져 갔으며, 아침마다 방문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의지하고 가족들에게 많이 기대게 되었다.


서로가 많이 힘들었지만

서로에게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욕심이었지만 누군가가 도와주기를 바랐다.


원인 모르는 백혈병을 내 탓이라고 생각하며 이겨내기에는 이겨 낼 힘이 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이 현실을 벗어나게만 해주다면 그나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기도를 하였다.


나의 기도는 왜 내게 이런 큰 시련을 주셨다는 질문들로 이루어졌으며 내가 던진 질문들에 아무런 대답 없는 주님은 그저 야속하였다. 그로 인해 쏟아진 눈물들은 나도 모르게 위로가 되었다.

내 상황을 한풀이하며 스스로 위로받은 상황일 수도 있지만 무신론자인 내가 처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게 된 기도이자 순간이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게 될 때 바로 설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내게 백혈병으로 인해 변한 나를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백혈병으로 건강을 잃었지만 신앙을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

나를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려주시겠다는 기도의 응답은 3년 뒤 내 모습으로 증명해주셨으며, 지나간 고통의 길목에서 부르짖는 나의 손잡아주심을 믿는다.

인생의 파도로 인해 내가 가졌던 대부분이 사라졌지만 내게 신앙이 남았으며, 난 그 신앙으로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이 나를 살려주시고 바로 세우신 이유는 불쌍한 나를 구해주심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나를 위로해주시고 공감해주셨던 주님의 그 순간들을 기록하고 나와 같이 힘든 시기를 보내는 이들에게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서 이유도 모른 채 낮은 곳으로 끌려간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억울하고 분노만 가득 찬 순간들이지만 무너진 나를 일으키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백혈병에 걸려 스스로 죽음을 생각했던 내가 이렇게 위로받았던 그날을 기록하는 것처럼

당신에게 신앙이 자리 잡는 축복이 온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바로 세워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곳이 고난 한가운데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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