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남은 것들
내 삶의 원치 않은 파도가 몰아치고
휩쓸고 간 그 자리를 나 스스로가 정리하며
짧게나마 느꼈던 고통들을 미화했고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결국 모든 것이 사라지고
끝이 날 줄 알았던 그날들도
지나간 고난을 축복하듯
내게 기념일이 돼버렸다.
2019년 6월 12일 지금으로부터 3년이 더 흐른 이 시점 백혈병에 걸린
그날이 내게 다시 온다면 나는 또 한 번 그날의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육체적으로 다시 한번 치료를 받을 수 있겠지만 내 안의 모든 것들은 아마 무너질 것 같다.
고난은 절대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기에 나는 오늘도 기도를 한다.
하지만 고난은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으며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고난은 왜 나에게 찾아왔던 것일까"
투병 기간 내내 던졌던 질문의 답은 치료가 다 끝난 3년 뒤 나에게 스며들었다.
모든 항암치료가 끝나고 치료 결과를 듣고 나오는 길의 따스함은 잊히지 않았다.
한 겨울이었지만 너무나 따뜻했다.
걷고 있음이 살아 있음이 너무나 행복했다.
고난이 사라졌기에 행복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난 그 이후에도 2년간 항암치료를 더했으며
심지어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행복했다.
고난은 항상 불행만을 내게 선물하지는 않았다. 정말 웃긴 비유지만
고난을 이겨내는 과정 중의 하나둘씩 이겨낼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주어진다.
크게 못 느꼈던 삶의 가치를 느끼고 스스로가 얼마나 나약한지도 느끼고
내가 이 세상을 어떤 목적과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도 알려주었다.
고난의 흉터는 내 인생을 바꿀 만큼 컸으며 평소의 나를 무너뜨리며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할 것 같았지만
가장 가치 있는 흔적을 두고 떠난 것이다.
고난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들에 집중하면 너무나 힘들고 아팠던 고통들도
무언가를 알려 주는 삶의 지표가 될 것이다.
밀물의 파도가 치고 썰물로 빠져나가듯이 고난의 파도도 내 인생의 크게 들어왔다가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빠져나갈 것이다.
고난이 다가올 때 고난의 파도를 타고 어딘가로 더욱 다가갈 것이다.
고난을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고난의 파도는 그 사람이 인생을 바꿀 만큼 아프다.
고난이 찾아온다면 당연히 피하는 게 우선이지만 하지만 찾아온다면 피할 수는 없다.
단지 고난이 오고 간 그 자리에
무엇이 남았는지 느끼고 집중하는 것이
고난을 지내고 배운 나의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