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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현 Jul 28. 2020

겸손보다 믿음

데스크에 오른 디자이너 40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왜 이렇게 여성이 없지?’, ‘여긴 대부분 남성이네?’ 지난 몇 년간 에디터로 일하면서 특정 분야의 연사나 인터뷰이를 섭외하거나 추천할 때, 누군가에게 원고를 청탁할 때 이런 생각을 종종 했다. 교수나 고위 공직자 등 여론을 주도하는 쪽이나 특정 영역(테크, 금융)으로 가면 여성의 절대적 수가 부족했다. 당장 내가 졸업한 대학의 교수 페이지만 봐도 이런 쏠림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는 강연이나 커뮤니티 서비스 영역도 마찬가지다. 내가 불특정 다수 앞에서 강연하거나 모임을 진행해야 할 때 전체 라인업을 보면 남성이 대부분인 경우가 많았다. 지난 2019년, 양실장과 함께 연사로 참여한 어느 자리는 주최 측이 고려 중인 1~5회 차 강연자가 모두 남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조심스레 “보다 다채로운 성별과 커리어를 지닌 연사들을 모실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제안드렸고 그 제안이 반영되기도 했다.


여성이 인터뷰 섭외를 거절한 비율도 높다. 각자 상황에 따라 사유가 다르겠지만 간혹 자신이 속한 업계의 동조 압력(peer pressure)을 의식하거나, 스스로 내공이 부족하다고 하며 거절하는 경우는 도리어 아쉬웠다. 후보자가 제안을 받는 경우는 대체로 내부에서 어떤 경로로든 후보자에 대한 1차 검증을 마친 뒤다. 즉, 대중이 후보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후보자에게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더 신중히 판단해야 할 것 같은) 남성 후보자들은 흔쾌히 수락하는 경향을 보였다. 물론 누군가를 다룬 글을 발행한 뒤의 리스크는 실제로 남성 쪽이 더 컸다.


간혹 강연이나 인터뷰 요청을 받은 양실장은 본인이 해도 될지 모르겠다며 내게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계속 무대에 나가서 말해야 동료나 후배들이 용기를 얻지.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에게도 좋지 않을까? 이참에 생각도 정리하고. 기회가 오면 꼭 잡아. 앞으로 더 잘될 일만 남았어.” 지금 시대의 여성에게 필요한 건 겸손보다 믿음이다. 내가 정말 잘하고 있다는 믿음, 내가 하는 말이 많은 이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는 믿음. 이미 젠더 권력을 갖고 있는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모순될 수도 있지만, 남성에게 필요한 건 믿음보다 자기 검열이다.


일부 매체와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한다. 요즘은 정치나 페미니즘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도 쓰이는데, 나는 이 비유가 불편하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현실에 대한 기만이기도 하다. 현실은 더 심각하거나 절망적인데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운동장이라는 사회 시스템도 기울어져 있고, 우리도 그렇게 길들여진 채로 기울어져있는 건 아닐까.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유튜브 스트리밍 캡처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이하 FDSC)의 활동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됐다. (참고 fdsc.kr/about) FDSC는 불균형을 바로잡고자 민첩하게 움직이며 연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불균형에서 비롯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여러 활동을 직접 실천하고 있다. 양실장도 고민 끝에 확신을 가지고 올해 1월, 클럽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양실장에게 이곳 소식을 전해 듣는 바로는 FDSC만큼 일을 똑 부러지게 하는 곳도 없는 것 같다. 회칙부터 클럽 운영 방식, 세미나 주제 등 배울 점이 많다.


현재 FDSC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와 연계하여 ‘지금 주목해야 할 디자이너 40인’을 4회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40명의 FDSC 디자이너를 또 다른 40명의 FDSC 디자이너가 소개하는 방식이다. 지난 3회 차에는 워크룸과 파일드 디자이너 유현선이 뉴닉 디자이너 양수현을 소개했다. 양실장은 바통을 이어받아, 마지막 회차인 8월 8일(토) 오후 2시에 스피커로 나선다. 얼마 전 꽤 화제가 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디자인한 분의 작업을 소개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이분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니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주목은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살핌, 또는 그 시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들을 주목할 때 믿음은 더 강해진다.


MMCA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 전시의 연계 프로그램 <지금 주목해야 할 디자이너 40>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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