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4분기 리뷰
2015년은 나에게 최고의 한 해였다. 몇 년 동안 여행을 준비해왔고, 무사히 완료했으니 주식시장에 비유하자면 ‘손 현’이라는 개인의 주가는 상한가를 쳤다. 이 주식이 딱 1주만 발행된 거라 나만 소유하고 있고, 장내시장이나 장외시장에서도 접할 수 없는 종이조각인 것이 문제지만, 어쨌든 경제적 관념으로는 당장 치환할 수 없는 가치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진짜 문제는 내가 2016년부터 아무런 계획을 세워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게 한 해의 사 분의 일이 훌쩍 지나는 동안의 이야기.
귀국 후에는 여행에 대한 글과 사진들을 마저 정리했고, 지난 3월 4일 드디어 마지막 꼭지까지 털었다. 글을 쓰는 동안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현실에 대한 불안과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기 위해 틈틈이 수영과 조깅을 하며 몸을 혹사시키기도 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뇌 역시 내 몸의 일부분이니 운동을 통해 몸을 피곤하게 하거나 바람을 쐬면 확실히 효과가 있다.
글을 일단락 짓고 잠시 한숨을 돌리는 동안, 엄마 친구 아들 유민이를 오랜만에 만났다. 원래부터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유민이는 대학에서 정치와 외교를 전공한 뒤, 결국 가톨릭 신학대학에 다시 입학했고 이제 2학년 과정을 마쳤다. 사제의 길을 걷고 있는 그에게 속세와 어떤 점이 다르냐고 물어봤더니, ‘경쟁이 없다’고 답했다. 며칠 후 유민이는 모라토리움(각주1)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일본 히로시마로 떠났고, 나는 나를 증명해야 하고 경쟁해야 하는 서울의 현실로 다시 돌아와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두 개의 모임에 새로 참여하기도 했다. 하나는 독서모임. 사실 독서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인데 왜 굳이 관심 없는 책을 읽고 그 생각을 남과 나누기까지 해야 하나, 라는 생각에 처음엔 내키지 않았다. 한편 모임을 지속하는 동안 특정 화제에 대해 서로 의견이 충돌하고, 때론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점점 흥미를 느끼고 있다. 상대가 논리적으로 반박할 때, 그것을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감정적으로 분해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반성하는 순기능도 있다. 평소에 직장에서든 친구들 사이에서든 이렇게 건강하게 토론한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책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현재 <건축신문> 편집자로 계시는 경희 씨의 추천으로 참여하게 됐다. 연령대와 직업군이 다른 6명이 모였지만 건축, 문학, 영화, 음악, 무용 분야로 조금씩 접점이 있었다. 각자가 기획한 주제에 대해 각자의 속도로 써 내려가는 모임인데, 무엇보다 창작의 고통을 분담하는 묘미가 있다. 특히 2월 말 즈음에는 내 글의 마무리를 어떻게 지을지 한창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이 분들과의 대화를 통해 힌트를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연말까지 모임은 지속될 예정인데 다들 어떤 결실을 맺을지 기대가 된다.
요즘은 <김대식의 빅퀘스쳔>이란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고 있다. 저자는 '결국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어차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라고 말하며 역으로 우리에게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라고 묻기도 하며,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며 선택의 자유가 정말로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던진다.
우선 올해 상반기까지 내가 매듭지어야 할 (또는 매듭짓고 싶은) 두 가지 과제는 ‘출판’과 ‘구직’이다. 그 바탕에는 ‘내 인생의 스토리를 내가 써 내려갈 수 있을까’는 화두가 놓여 있다. 당장 여러 개의 옵션이 주어졌다. 출판을 결심한 순간, ‘독립출판’ 방식을 택할 것인지, 기존 출판사를 통해 진행할지 선택해야 했고, 다시 구직자 신분으로 돌아오니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를 원점으로 돌아와 다시 정해야 했다. 연봉, 업의 성격, 적성, 타이밍 등등. 얼마 전에는 대기업 임원 출신 분과 점심 식사를 하며 큰 조직에서 연봉만 좇는 것이 무조건 정답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한 가지 세운 원칙은 10년 뒤 내 모습을 다시 그려보고, 그 길에 맞는 방향이면 크게 흔들리지 말고 주욱 가야겠다는 입장이다.
낚시를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번 봄의 많은 과정이 낚시와 닮아있다고 느낀다. 내가 주로 취해야 하는 포지션이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것의 정수는 <스포트라이트 Spotlight(2015)>를 통해 접했다. 영화는 보스턴 글로브에서 탐사보도를 전문으로 하는 스포트라이트 팀이 수많은 콜드콜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취재하기 위해 집요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과 그것을 탄탄히 뒷받침해주는 편집장과 팀원들을 보여준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기사를 섣불리 발행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릴 줄도 알았다.
나 역시 콜드콜과 콜드콜 사이에서 내게 맞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누가 낚시꾼인지 누가 물고기인지 가끔은 헷갈리지만.
(각주1)
moratorium; 가톨릭 신학대학에서는 신학대 과정 중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신학생을 대상으로 봉사, 선교 등의 목적으로 국외지역으로 1년 동안 파견한다. 원래 경제용어로 쓰이며 지불유예기간을 의미하지만, 사회적 자아를 확립하기 위한 유예기간을 뜻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