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Micro)와 거시(Macro) 사이
나는 정유, 화학공장을 주로 설계하는 플랜트 엔지니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근무하는 동안 내가 속한 산업의 동향이 궁금했다.
엔지니어링은 설계(Engineering), 구매(Procurement), 시공(Construction)을 아우르는 EPC 산업에 속하며, 에너지, 화학, 전자 업종에서 수주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해당 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주로 그쪽 산업 리포트를 종종 챙겨 봤는데 언제부터인가 업황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여러 평가사를 통해 반복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눈여겨봤던 몇 개의 보고서 중 하나다. (관련 보고서: 건설회사, 조선회사, 대규모 손실 시현 이유는? / 2014.10)
'자신이 속한 산업 군의 불확실성(Uncertainty)에 대해 인지하기'란 기사에 의하면, 엔지니어링이 속한 비즈니스 서비스업(Business Services)은 수요가 고정적이지만, 고객 산업 특성과 복잡하게 엮이기 때문에 기술적 난이도는 높은 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표에 의하면 조선업 역시 타 업종에 비해 '불확실성'이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다. 오히려 평균 이하다.
한편 나는 개인적인 계획과 점점 나빠지고 있는 업황을 고려해 결국 엔지니어링 회사를 떠났다. 그 사이 중화학, 중공업, 해운, 조선업 등의 업황은 실제로 더 나빠졌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지인이 근무하는 조선소에 잠시 들를 기회가 있었다. 동향을 반영이라도 하듯 분위기가 스산한 것이 비단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기는 그나마 상황이 나아요. 이미 몇 년 전부터 신조(新造) 물량이 떨어지는 걸 감지하고 사장이 대대적으로 구조조정한 다음에 수리 조선소로 바꿨거든요. 배를 수리하고 유지 관리하는 일은 그래도 꾸준히 있으니까. 나머지 조선소들은 당장 일감은 없고, 야드(Yard)는 텅텅 비니까 다른 회사 작업장으로 임대하기도 해요." (조선업 관계자)
나무를 열심히 베고 있는 사람은
숲을 볼 여력이 없다.
어디서 산불이 나더라도
알 길이 없다.
2016년의 한국. 한때 (조선업을 비롯한) 제조업 강국으로 자화자찬하던 한국의 현실은 요즘 언론에 자주 언급되는 '법정관리', '상장폐지 심사' 등에서 느껴질 정도로 뒤집혔다. 산불이 나기 시작했다.
주요 기사들(2016년 9월 2일 기준)
• 대한민국 조선업은 어떻게 이지경이 됐나
• 한진해운發 '물류 쇼크'.. 운임 48% 폭등
그 외 굵직한 키워드들만 모아봤다. 강만수 전 산업은행장 관련 비리, 한진해운 '법정관리' 업계 파장, 국책은행 문제 및 대응책 등
보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나무꾼을 조명한 영화와 책을 추천한다.
김정근 감독의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30년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2014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개봉까지 2년이 더 걸렸고, 지난 8월 25일 개봉했다. (관련기사: 노동의 역사에 대한 진득한 기록 <그림자들의 섬> 인디토크(GV) 기록)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연재된 '위험의 양극화, 산재는 왜 비정규직에 몰리나'와 '조선소 잔혹사'를 비롯해 저자 허환주가 6년간 조선소를 취재하며 쓴 기사를 바탕으로 엮은 책이다. 지난 7월 28일 취재 후원을 요청하는 스토리 펀딩을 마쳤다.
"대기업인 대우조선해양에 나 같은 사내 하청 노동자 한 명 채용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닐 테지만, 그들은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정말 오르고 싶어서 오른 하늘이 아니었다."
(타워크레인 위에서 하청노동자 강병재 씨) / 책 본문 중에서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적 시각에서 대우조선해양의 경영진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법적인 문제는 별론으로 하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보수와 임기를 극대화하기 위해 주어진 구조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분명한 것은 대우조선해양과 산업은행의 경영진 선임 과정에 중간 단계의 대리인들이 계속 개입하는 한 지금과 같은 현상은 언제든지 또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리인들 입장에서는 버는 돈이든 쓰는 돈이든 다 남의 돈이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대리인 시스템 안 바꾸면 대우조선의 비극은 또 일어날 수 있다)
사람들은 늘 책임을 묻는다. 물론 이 과정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에 회의적이다.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의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간은 무엇을 책임질 수 있을까?
"발터 벤야민은 기계적 복제가 가능한 현대 사회에 '원본'이라는 개념이 더 이상 가능한지 물었다. 사진기로 <모나리자>를 100만 번 똑같이 찍어낼 수 있는데, 왜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있는 한 장의 그림만이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벤야민의 사촌동생이자 철학자였던 귄터 안더스는 책임감의 복제에 대해 생각했다.
혼자서 한 명은 죽일 수 있지만, 혼자 100만 명을 죽일 수는 없다. 100만 명을 죽일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고,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공장이 필요하다. 공장은 기계가 필요하고, 기계를 만들 수 있는 과학과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100만 명을 죽인 책임은 도대체 누구에게 있을까?
p.132 '김대식의 빅퀘스천' 중 발췌
책임은 책임대로 묻되, 이 상황을 명쾌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서 산불이 나는지도 모르는 채 나무만 열심히 베면 안 되는 세상이다.
어쩌면 '한국'이라는 국가 역시 '전 세계'라는 숲에 있는 아주 여린 한 그루의 나무인지도 모르겠다.
이번엔 숲을 볼 수 있는 프로젝트를 추천하고자 한다.
'지적 콘텐츠에 대한 소비자와 공급자를 적절하게 연결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PUBLY*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다. (관련 기사: '돈 낼 준비는 됐는데 돈 낼만한 콘텐츠가 없다')
* 퍼블리 PUBLY;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어른들을 위한 지적 콘텐츠와 커뮤니티를 만듭니다'는 모토로 지난 2015년 4월에 설립된 미디어/콘텐츠 기업이다. - PUBLY
한국 조선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잘못된 판단과
이로 인한 과잉투자에서 비롯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하지 못한 것이
오늘날 위기의 시초며
그 후 긴 호황은 신흥국의 부상과
커머더티 슈퍼사이클이라는
거대한 글로벌 경제의 변화에서
파생된 행운
프로젝트 소개 글 일부
<최종 리포트 목차> 프로젝트 자세히 보기
1. 프롤로그: 짧은 영광과 몰락
2. 한국 조선업의 역사
- 우린, 거북선을 만든 민족이오
- 초대형 컨테이너선의 시대
- 호황의 끝, 재앙의 시작
- 부록: 글로벌 물동량은 왜 늘지 않나
3. 상식의 실패
- 마지막 호황 혹은 마지막 착각
- 수주를 채워라
- 플랜트의 수렁
- 부록: 오너경영과 초경기민감(Deep Cyclicals) 산업
4. 구조조정인가 소멸인가
- 거제도의 오늘
- 가까운 미래
- 한, 중, 일 3국 조선업의 공존은 가능한가
- 부록: 한국 산업의 샌드위치론
5. 에필로그: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글 손현 | PUBLY 에디터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어른들을 위한 지적 콘텐츠와 커뮤니티를 만듭니다.
퍼블리 PUBLY http://puby.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