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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떰브 Sep 02. 2020

한국어 선생님 일기 01

01 어쩌다 보니 한국어 선생님

어쩌다 보니 한국어 선생님


방송작가가 되겠다고 염불을 외던 학창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로맨스 드라마를 섭렵하며 꼭 커서 저런 드라마를 쓰는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고 했다가 중학교 때는 '무한도전'이 너무 좋아서 예능 프로그램 작가가 되겠다 했고, 고등학교 때는 다큐멘터리 작가, 대학생이 되어서는 독립 영화에 푹 빠져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며 영화제작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었다. 장르는 다양하게 변화하였으나 어쨌든 글을 쓰며 살겠다는 다짐은 우직할 정도로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최근 몇 년간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몇 년 사이에 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언니의 권유로 대학교 3학년 때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이 때 일본어 실력이 크게 늘자 영어에도 욕심이 생겨 휴학하고 영국으로 1년간 어학연수를 가게 되었다. 런던에서 생활했는데, 그 당시 런던대학교 학생들과 교류할 일이 많았다. 런던대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한국어와 한국어 문화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 때부터 한국어 교원이라는 직업에 관심이 생겨 한국으로 돌아와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한국어 교육을 전공하였다. 그리고 석사 학위 취득 후 한 대학교 어학당에서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데 딱 5년이 걸렸다. 사실 나의 12년 학창 시절의 모든 계획과 목표는 '작가'라는 두 글자에 맞추어져 있었는데 단 6개월에 불과한 교환학생 기간이 작은 계기가 되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겼더니 나는 어느새 매일 교안을 확인하고 수업을 준비하는 '한국어 교원'이 돼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학원 졸업 과정은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겼다기 보다는 고군분투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수업을 준비할 때 나는 과거의 꿈이었던 ‘작가’라는 직업을 어느 정도 실현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매일 학생들이 이해하기 쉬운 최적의 예문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수업의 도입 부분과 새로 배우는 문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원맨쇼(?)를 구성하는 일은 마치 짧은 콩트의 대본을 써내는 것과 비슷했다. 물론 각본, 연출, 연기까지 모두 도맡아야 했지만 방송 스크립트 대신 교안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꿈에서 그리 먼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게 몇 개 있기는 한데 사실은 다 얕아서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어 늘 고민하는 인생이었다. 이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고민이다. 그런 내가 '한국어 교원'이라는 직업을 가져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소통했다. 일을 할 때 늘 외국인 학생들에게 '선생님'이라 불리는 것이 낯 뜨겁고 어색했다. '왜 멀쩡한 대학 나와서 강사를 해요?'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사람도 있을 수는 있겠다. 사실 그 어떤 대학을 가더라도 한국어 교원에 대한 대우는 썩 좋지 않았다. 팔 할이 계약직이었고, 급여도 적었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부분 때문에 머리도 아픈 직업이지만, 참으로 신기한 것이 수업을 하고 나오면 힘이 났다.  그러니 적어도 당시의 나에게 '한국어 교원'은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며 일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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