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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떰브 Sep 24. 2020

진통제의 날

생리를 하기 시작하면 첫날이 가장 괴롭다.

뱃속의 근육들이 빨래 쥐어짜듯 꾹꾹 당긴다. 그 불쾌한 리듬에 맞춰서 온 장기들이 딸려갔다가 다시 풀리는 듯한 기분 나쁜 아픔이 하루 종일 반복되는 것이다. 어제도 그랬다. 진통제를 몇 알이나 삼켜보고, 배 위에 찜질팩을 한참 올려 아랫배를 뜨겁게도 해보고, 요즘 새로운 대안이라는 스포츠 테이핑 요법을 써 보기도 했지만 듣지를 않는다. 그래서 그냥 이리 굴렀다 저리 굴렀다 할 뿐이었다.

누워서 아파하기만 하다 나 부르는 남자 친구 문자에 정신 차리고 생리통에 고통받는 나의 상황을 전달했다. 그리고 두 시간 후에 남자 친구가 퇴근하고 집으로 오고 있다는 말을 했다.

하루 종일 집안일도 다 미루고 씻지도 않다가 그 말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서 빨래를 돌렸다. 청소기로 거실, 부엌, 안방 바닥에 있는 머리카락들과 자잘한 먼지들을 청소했다. 그리고 쌓여있던 설거지도 얼른 끝내고 샤워도 말끔히 했다. 방치하던 집을 한 시간 만에 정리했고 샤워까지 하고 나니 무척 상쾌했다.

남자 친구가 나한테 온다는 말을 안 했으면 그냥 종일 아파하기만 했겠지 싶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침대에 누워서 오래 데친 시금치처럼 푹 삶아져 누워있었는데, 열심히 청소기를 돌리는 내 모습이 새삼스럽기도 했다. 심지어 어제도 남자 친구랑 같이 있었는데 말이다.

2년 전 연애 초반, 배 아프다는 말에 진통제를 종류별로 다 사 와서 식탁 위에 초콜릿과 함께 풀어놓던 남자 친구였다. 그리고 함께한 900여 일의 시간 동안 남자 친구는 정말 한결같이 내 생각을 많이 해주었다. 어제도 그랬다.

1. 직구한 미국 과자 한가득 들고 와서 맛 설명 하기

2. 여자 친구 배 아프니까 따뜻한 진저 라테 만들어 주기

3. 뒤늦게 배고파하는 여자 친구 소고기 구워주고 설거지까지 싹 하고 가기.


밥을 다 먹고서는 같이 소파에 누워 꼭 안고 TV를 봤다. 그러다가 배가 또 아프면 남자 친구가 배를 만져주기도 했다. 같이 있으면 너무 웃기고 재미있다. 그래서 어제도 계속 웃었다. 그러다 보니 배가 아픈 것도 그럭저럭 참을만하게 느껴졌다.

약도 찜질도 테이핑도 다 소용없던 하루에 남자 친구가 진짜 진통제가 되어준 하루를 꼭 기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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