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정말 어영부영하다 보니 어느새 한 해가 지나가고 이제 달력도 1장이 채 남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맘때쯤이면 종종 왠지 모를 억울함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곤 한다. 작년부터 이어진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우리는 일상에서 평범했지만 소소한 행복을 주던 루틴도 거의 못 누리고 살았다. 하지만 대자연의 끊임없는 순환은 늘 그러하듯 우리 인간들을 조금도 봐주는 법이 없이 시간은 또 속절없이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다.
태생적으로 에너지가 많고 꽤 부지런한 편이라 한국인의 전형처럼 나 또한 10대 시절부터 숨 가쁘게 성실히 늘 살아왔다. 20대 중반이라는 요즘 기준으로는 다소 어린 나이에 첫사랑과 덜컥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내리 낳고 키우는 일을 소명으로 알며 오롯이 매진하다 보니 어느새 40대 끝자락, 곧 50을 바라보는 시점에 서 있는 중년의 여인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각 연령대별로 삶의 단계마다 주요 과업이 있다. 성별에 상관없이 파릇파릇한 10-20대는 대다수가 입시, 취업공부였으며 초기 어른 단계로 진입하는 20-30대는 좋은 곳의 취직이 전부였다. 여성의 경우 특히 결혼, 출산, 육아 등 특별한 생의 계획이 있지 않는 한 대부분 그 거대한 운명의 트랙 안에서 어쩔 수 없이 남들과 엇비슷하게 유영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삶의 과업들도 서서히 사라지는 50대부터 내 인생의 남은 날이 전부
휴가라면 과연 어떨까? 문득 떠오른 이 질문 덕분에 잠시 생각에 잠기니 갑자기 양 어깨와 겨드랑이에 간질간질하며 날개 돋친 듯 묘한 설렘과 무거웠던 몸이 다소 가벼워지며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 좋은 느낌이 든다.
일단 내 인생의 앞으로 남은 날들이 전부 휴가라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의 반쪽인 남편과 함께 그토록 꿈꿔오던 세계일주를 용기 내어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 스스로 전생이 축구공이라고 여길 정도로 축구 덕후인 남편을 따라 전 세계 축구 테마 여행도 좋고 여심을 늘 사로잡는 각종 아기자기한 소품과 패션, 특이한 인테리어 등을 눈으로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 해해며 무척 즐기는 나의 오감을 채워주는 주제로 지구촌을 한 바퀴 돌아도 좋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다양한 책들을 무척 애정 해서 전 세계 유수한 도서관 기행도 늘 꿈꾸고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저 계속 쉬기만 하는 것이 과연 즐겁기만 할까? 적절한 노동의 기쁨도 분명히 있을 텐데 쉼이 없는 노동은 고통이 될 수 있겠지만 아무런 의미부여 없이 그저 계속 쉬기만 하는 것이 과연 천국의 삶일까? 아님 지옥의 삶일까? 그런 생각이 미치자 이런 노후의 넉넉한 시간들을 좀 더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전 세계 주요 도시에 여유 있게 머무르며 1-2달 살기를 통해 현지 사람들의 생활상도 좀 더 가까이 접하고 관찰하며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자원봉사를 해도 참 좋을 듯하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삶이 주는 경험이 자의든 타의든 다양해지면서 내가 미처 알지 못하던 나 자신을 성찰하고 알아차리기 위해 봉사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동안 바쁜 일상의 쳇바퀴에 쫓겨 놓친 수많은 좋은 영화들과 음악도 발리나 하와이 같은 쾌적한 리조트풍의 이국적인 방에서 감상하고 미처 읽지 못한 많은 명저들도 밤새워 읽고 싶다. 생각만 해도 너무나 좋은 몽상들이다.
세상을 우리보다 오래 살아낸 어르신들은 이 우주에는 나쁜 것이 100%만 있는 건 없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도 그나마 고마운 몇 가지가 있다면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끊임없이 부를 창조하기 위해 정신없이 바쁘던 우리의 치열한 일상의 시계가 반강제적으로 다소 늦춰졌다는 것이다. 나의 에너지원이 되는 소중한 한 끼 식사를 그저 고칼로리 섭취인 인스턴트로 해치우거나 때우기로만 하던 사람들이 로컬에서 장을 직접 보고 시간을 내서 요리를 하고 재테크 근무 및 온라인 학교 등을 통해 가족들이 함께 하는 물리적인 시간도 덩달아 많아지면서 집 안에서 그동안 못다 한 속 깊은 대화들도 더욱 친밀하게 나누게 된다. 우리는 모두 동등할 정도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세상을 늘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인생의 수레바퀴 밑에서 결국 우리는 마냥 울기보다는 용기를 내어 웃기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인생관 중 하나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발 빠르게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이왕이면 즐겁고 씩씩하게 적응해 나가며 나만의 행로로 족적을 남기며 지금처럼 뚜벅뚜벅 나아가고 싶다. 내 영혼의 궁극의 자유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