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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토끼 Apr 16. 2022

X 세대의 신식 어부바 양육기

X 세대의 앞부바 이야기

  

어느새 내 나이도 40대 후반, 요즘 아이들 단어에 의하면 나는 이젠 옛날 사람이다. 자고로 여자는 그저 집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신한 게 최고의 덕목이라는 암묵적인 정서가 강한 경상도 지역에서 쭉 성장해 왔다. 어려서부터 다행히 머리 회전은 남들 못지않게 빠른 편이어서 부모님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랐지만 아쉽게도 타고난 신체 지능은 다소 떨어진 탓인지 손재주도 그다지 없고(파괴의 손) 덜렁대는 기질까지 더해져서 모든 행동을 할 때마다 실수도 잦고 그래서 칠칠맞다는 타박도 자주 들었다. 더군다나 또래보다 조숙했던 초등 고학년 시절 여자로서 나의 성 정체성에 서서히 눈 뜨게 되면서 난생처음 설레며 첫 이성의 감정을 품은 같은 반 남자 친구에게 단지 여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힘겹게 입 밖으로 낸 고백을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을 때는 어린 마음에 나 스스로 여자로서의 매력에 관해 의문을 가지게 되고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성장과정에서 한 번도 평범한 여자들이 대부분 갈망해본다는 결혼한 여성의 삶이나 육아를 꿈꿔 본 적이 거의 없다. 그저 부족한 나의 여성성을 탁월한 능력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부에만 매진했고 독신인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성공만을 그리며 10~20대 시절을 오롯이 바쳤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늘 그러하듯이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들보다 좀 더 살아보신 어른들은 세상사에서 어떤 일이건 함부로 장담하지 말라고 하셨나 보다. 벌써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다소 긴 세월인 22년 전, 운명처럼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무언가에 홀린 듯 당시로도 꽤 어리게 여겨지는 2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 결혼이라는 것을 해치워 버렸다. 그리고 늘 말 잘 듣는 모범생처럼 출산이라는 수순 과정도 당연히 밟아 갔다. 돌이켜보면 젊어서, 아니 어려서 결혼과 육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백지장 상태에서 그저 용감하기만 했던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면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귀여운 아기들 혹은 애완동물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보살피는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자의식과 개인적인 성향이 다소 강한 나의 경우 어떤 아기나 아이도 짧은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은 그나마 괜찮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돌봄 자체가 부담스럽게 여겨진다. 타고난 태생이 이러하니 노력을 해도 성향 자체는 크게 바뀌지가 않았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사촌동생들도 본능적으로 눈치챈 탓인지 명절이나 각종 행사 때마다 우리 집에 모여도 내 방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결혼 전에는 아무리 분위기 좋은 식당에 들어가다가도 아이가 옆 테이블에 있으면 그 특유의 정신없고 부산한 분위기가 싫어서 그냥 나와 버리곤 하는 까칠함도 종종 보이곤 했다. 그런 내가 20대 후반이라는 미처 여물지 못한 이른 나이에 내 한 몸 겨우 건사하기도 힘들어하면서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 태어나서 살아 움직이는 아기라는 존재를 출산 후 병실에서 그날 처음으로 자세히 본 듯하다. 책이나 영화 혹은 주위 이야기를 들어보면 타인들은 출산이라는 자체가 여성을 위한 위대한 선물이며 그 순간에 모두 감격스럽고 환희에 벅차오른다는데 나의 현실은 달랐다. 내 아이라서 그저 경이롭고 기뻐하기보다는 솔직히 양육이라는 여성으로서 일생일대의 큰 숙제에 대한 두려움이 음습해 와서 밤새 잠을 못 이룬 기억이 난다. 한 생명에 관한 책임감이 이렇게 막중한 것이었구나.. 철없던 결혼 결정 탓에 나의 20대는 여유도 없고 중소기업의 외벌이 신랑 수입으로 하는 생활은 하루하루 정말 빠듯했다. 양가 부모님들도 모두 멀리 떨어져 계시고 잠깐이라도 도우미 아줌마를 쓸 형편도 안 되어서 첫아이를 낳고 퇴원한 그날부터 거의 매일 눈물 콧물 흘리며 소위 독박 육아라는 걸 시작했다.      


지방대 출신이었지만 나름 포부를 가지고 단기 유학도 다녀오고 명문대생 조차도 어렵다는 토플, 토익을 만점 가까이 받는 나의 넘치는 열정과 스마트함도 현실 육아에서는 단 1%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스스로를 더 절망스럽게 했다. 학창 시절과 결혼 전에 밤새워 읽던 숱한 자기 계발서와 성공서 만이 서점에 나와 있는 책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육아서라는 우리네 삶에서 꼭 필요한 책의 새로운 장르에 눈을 뜬 것은 두 아이를 낳고 5년이나 지나서였다.


우리는 초등학교 입학을 하면서부터 아니 유치원 시절부터 소위 공부라는 것을 시작한다. 하지만 삶의 여정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진짜 공부에는 아직 사회적으로 인식이 미비했던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사회와 거의 단절된 채 오로지 육아에만 집중했다. 나의 유년 시절을 되돌아볼 때 어쩔 수 없이 워킹 맘의 길을 걸었던 엄마와 헤어지는 게 싫어서 울면서 억지로 떨어져 성장한 세월도 내 속에 여전히 머물고 있어서 그 크고 작은 상처를 내 아이들에게는 대물려 주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에서 비롯된 듯 같기도 하다.     


두 아이 육아에서 가장 큰 난관 중 하나는 소위 X세대인 나는 몸을 제대로 못 가누는 갓난아기를 혼자서 어부바를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밀레니얼 세대부터 요즘 초등학생들은 쪼그려 앉는 재래식 화장실 이용을 외국인들만큼 힘겨워한다. 나에겐 어부바라는 돌봄의 형식이 그랬다. 옆에서 잠깐이라도 도와주는 분이라도 있으면 억지로라도 숙여서 등에 업고 우리 어머니 세대들이 그랬듯이 포대기로 감싼 채 기본적인 집안일이라도 하며 살림과 육아를 함께 꾸려나가면 되는데 혼자서 낑낑대며 어설프게 시도하다가 충격 방지 매트로 아이가 꼬꾸라져 떨어져 위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점점 겁이 나서 결국 포기해버렸다. 그래서 그 이후로 안전상의 이유로 아이들을 포대기로 어부바를 해 준 기억은 아쉽게도 없다. 가끔 집에 방문하시는 친정 부모님은 이런 내 모습에 세대 차이를 느끼며 기가 막혀하셨지만 그게 나의 양육 방식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2000년대 초반에는 슬링이라는 캥거루 띠처럼 생긴 초간편한 앞으로 하는 아기띠가 유행이어서 그 띠로 두 아이를 안전히 키워냈다. 소위 신세대의 어부바인 셈이다. 앞으로 대부분 안았으니 앞부바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혼자서 눈물 콧물 흘리며 두 아이를 키워 온 세월도 어느새 쏜살 같이 지나가고 이제 몇 달 뒤면 첫 아이는 드디어 앞자리가 바뀌는 20대가 된다. 책과 영화로도 소개된 82년 김지영처럼 젊은 시절의 나는 엄마라는 역할이 육아라는 현실이 몹시 원망스러웠다. 나 개인으로서의 성장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아이들을 위한 끝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무조건적인 모성애 강요에 분노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모두 성장하고 난 후 돌이킬 수 없는 후회라는 걸 혹시 하게 될까 봐 이를 악물고 나름대로 나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누구나 알다시피 세상살이는 참으로 만만치가 않다. 각자 인생에서 삶의 물결은 몹시 거세고 우리는 종종 그 개울들을 향해 중심을 잡으며 또 건너가야만 할 때가 있다. 정상에 오른 모 개그맨이 강의에서 그런 세찬 물살을 건널 때는 평소에 그저 무겁기만 한 내 등의 짐이 때론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고 해서 한동안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지인들과 무자식이 상팔자라며 두 아이가 늘 인생의 2개의 무거운 추 마냥 내 등 뒤에 매달린 것 같아 항상 힘들다고 투덜대기만 했었는데 돌이켜보면 때론 거친 삶 속에서 자칫 쉽게 쓰러질 수 있는 나약한 나를, 뒤에서 가만히 따뜻하게 매달린 채 오히려 안아준 것도 소중한 나의 아이들이었다. 어려서 전통적인 방식의 어부바를 많이 못해 준 것이 종종 마음에 걸려서 3-4살 이후 아이들이 어느 정도 스스로 몸을 가누게 되고 난 이후로 되레 앞으로 안아서 나의 심장 소리를 가만히 듣고 안정될 수 있게 해 주거나 여전히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해 어부바도 가끔 해주었다. 그런 따뜻한 기억과 추억 탓인지 사춘기가 한창인 두 녀석들은 아직도 나와의 스킨십을 전혀 어색해하지 않아 고마운 마음이 크다.     


우리말 표현 중에 행복하거나 만족스러운 상태를 등 따시고 배부르다고 하다. 그만큼 등이라는 신체 부위가 우리 눈에는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꽤 민감한 듯하다. 여자들의 비밀을 하나 나누자면 남자들의 생각과는 달리 여성들은 앞에서 꽉 안아주는 격한 연인 사이의 포옹도 좋아 하지만 뒤에서 은근히 전해지는 포옹에 편안함을 오히려 느낄 때가 많다. 그만큼 우리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지닌 등은 민감하고 때론 쓸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보게 된다. 오롯한 성인이 되어 독립적으로 각자 살아가면서도 삶이 힘겹게 느껴질 때면 우리는 이런 위로가 담긴 따뜻한 어부바가 그래서 서로에게 여전히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이 무척 바쁘셨지만 다행히 사랑 표현과 스킨십이 많은 가정이라서 나 또한 친한 지인들과 어울릴 때는 반가움과 친숙함의 표시로 신체적 접촉을 나누기 좋아한다. 특히 동성일 경우 힘든 속내를 서로 나눌 때 등을 살짝살짝 쓸어주거나 토닥토닥해주면 대부분의 상대방이 평온함을 내비치는 경우가 많다.      


몇 년 동안 코로나로 특히 사회분위기가 많이 경직되고 힘들어하는 분들을 자주 보게 된다. 우리 모두는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일원 성 즉 무의식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그런 분들을 뵐 때마다 내 마음도 몹시 아린다. 한자의 人(사람: 인) 자를 보면 一(한: 일) 같은 나무 막대기가 서로 기대어 있는 형태이다. 이 글자처럼 서로에게 보다 따뜻한 등을 종종 내어 주며 함께 더욱 동반 상승할 수 있는 연결된 사회를 2022년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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