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방문 후기
연둣빛이 짙어지는 유월, 휴가를 내고 조카 둘과 함께 청와대에 다녀왔다. 원래는 누나랑 조카들과 같이 가려고 했는데, 누나가 듣는 수업을 빠질 수 없어서 내가 조카들만 데리고 갔다. 조카들이 회사 근처에서 살아서, 가끔 둘째 유치원 하원을 도와주거나 저녁을 함께 먹는다. 여느 때처럼 “제가 데리고 다녀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과 함께 아이들의 서울 투어 가이드를 자처했다.
경복궁역에서 내릴 때 둘째가 말했다.
“외삼촌이랑 데이트한 거 처음이야.”
“우리 맨날 같이 놀잖아. 그게 다 데이트지.”
역을 나서자 이미 많은 사람이 청와대를 향해 걷고 있었다.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자, 급하게 가방에서 우산을 꺼냈다. 조카들은 관람 대기 줄을 서자마자 핸드폰 게임을 시작했다. 첫째는 ‘무한의 계단’, 둘째는 ‘로블록스’. 청와대에 온 기념으로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려고 하면 게임을 하는데 방해된다는 듯,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마지못해 떨떠름한 자세를 취했다.
“너희들 게임하려고 여기 온 거 아니야!”
건성으로 알겠다고 대답하는 조카들. 눈앞의 의미도 모를 건물들보다는, 손안의 스펙터클에 더 끌리는 아이들이었다. 하긴 나도 역사적인 건축물보다는 탁 트인 바다를 보러 떠나는 성향이라, 조카들의 지루함도 이해했다. 서울 시티투어 버스를 타러 가도, 수원 화성까지 스탬프 투어를 하러 가도, 결국 그 앞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게 가장 재밌을 나이. 겨우 초등학교 4학년과 유치원생이었다. 안타깝게도 청와대 안에는 애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시설 같은 건 없었다. 당연했다. 유아용 진로 체험 공간인 ‘잡월드’가 아닌, 실제로 대통령이 업무를 하던 곳이었으니.
“대통령은 몇 살 돼야 할 수 있게?”
“20살?”
“그건 국회의원. 업!”
“30살?”
“땡! 정답은 40살입니다!”
설민석으로 빙의해서 한바탕 역사 강의를 해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대통령의 피선거권 연령은 아이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대통령 초상화는 그림이고, 영부인 초상화는 사진이네. 영부인은 대통령의 배우자야.”
“장관이 되면 여기서 임명장을 받나 봐. 개방 안 했으면 외삼촌은 평생 올 일이 없었겠다. 그치?”
옆에 붙은 설명을 열심히 읽어줘도 조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연신내 한국관 앞이나 지나가 봤지, 청와대 영빈관 같은 곳은 근처에도 못 가봤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이 지금 근무하는 것도 아니고, 층고가 높은 게 인상적이었을 뿐 별다른 감흥이 들지는 않았다.
“외삼촌. 사람 많아서 힘들어. 나갈래.”
원래 김 씨들은 다 청와대를 싫어하는 걸까? 막 하루라도 머물고 싶지 않고 그런가?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첫째의 말에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30분 동안 줄 서서 기다렸다가, 12분 만에 본관에서 나왔다. 전 대통령(현 내란수괴)의 선거 구호처럼 “좋아 빠르게 갔다.” (사실 안 좋았다)
청와대를 나와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첫째는 시장 초입에서 본 ‘벚꽃떡볶이’를 먹고 싶다고 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기름떡볶이를 먹어야지!’하는 생각에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둘째는 간장떡볶이를 맛있게 먹었지만, 첫째는 한두 개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젓가락을 내려놨다. 마음이 약해져 ‘벚꽃떡볶이를 먹으러 갈까?’ 싶었지만, ‘갔는데 또 두 개 먹고 안 먹는다고 하면 어떡하지?’ 고민하다, 결국 콜라 슬러시로 입가심하며 통인시장 구경을 간단히 마무리했다.
교보문고에 들러 첫째는 『무한의 계단』 공식 캐릭터 대도감 1권을 사고, 둘째가 좋아하는 충무공 이야기에 가서 놀았다. 롯데월드 왜 가냐. 광화문에서 K컬처 어트랙션 타면 되는데! 저번에 갔을 때랑 다른 영상이 나와서 더 재밌었다. 거북선이 만들어지고 처음 출전하는 사천해전 이야기였다. 거북선의 맹렬한 충파로 왜선이 부서질 때마다, 우리 셋밖에 없는 극장에서 둘째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래 이거지! K-조선술 맛 좀 봐라. 침략자 왜놈들아!
결국 조카들이 좋아하는 경로로 서울 나들이를 마쳤다. 대학생 때 잠시나마 금강산 관광이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기를 놓쳐서 아직 북녘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있다. 조카들이 커서 "나 청와대 가봤어."라고 말할 수 있는 추억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게 누나와 나, 두 어른의 소박한 바람이었다. 근데 그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애빌린의 역설(Abilene Paradox)’이란 말이 있다. 집단의 구성원 중 누구도 원하지 않았음에도, 결국 모두가 그 결정에 동의하는 역설. 내 생각엔 청와대 개방과 이번 방문도 그랬다. 후임 대통령도, 대다수의 국민도, 나도, 조카도 모두 행복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번 여름방학 땐 첫째의 소원대로 제주도에 가야겠다. 한라봉 모자 쓰고, 흑돼지를 구워 먹고 바다를 걷는 여정. 나는 파도 앞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조카들은 생애 첫 비행기를 타며 창밖 구름 풍경에 눈을 반짝이겠지? 비행기 엔진이 굉음을 내며 활주로를 달리는 첫 이륙은, 4D 극장의 거북선 체험보다 훨씬 생생한 기억으로 남을 거다. 이번에는 우리가 모두 행복한 순간이 되기를. 그런 여행을 꿈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