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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리타의 ‘치유의 글쓰기’

들짐승처럼, 쓰지 않으려 애쓰다가 결국 쓰게 되는 삶에 대하여

by 행복의 진수

안리타 작가의 ‘치유의 글쓰기’는 그랬다. 쓰지 않으려 발버둥 치던 마음이, 기어코 쓰고 싶어지는 마음으로 바뀌는 순간. 들짐승처럼 야생에 가까운 글, 무언가를 위해 기획한 글이 아니라, 산책하고 수집하고 조각조각 맞춰나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의 글.


“하루에 1mm씩이라도 움직이면, 20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예요.”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나날들이 우리를 어느 지점까지 데려다줄지도 모른다고.


그녀의 삶은 그 말처럼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흘러왔다. 지리산 구례에서 5년을 살았고, 하루에 개 산책을 3시간씩, 태풍이 몰아치는 날에도 나갔다. 산책은 그녀의 글쓰기였다. 꾸준함과 내버려두는 시간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방식. “쓰고 싶지 않을 땐 안 써요. 그냥 놀아요.” 그러다 결국엔 쓰고 싶어지는 마음으로 바뀐다는 고백이, 글을 쓰는 이로서의 고통과 즐거움을 동시에 전했다.


그녀의 글은 기획보다 조각이다. 조각조각 떠오른 말들이 6개월 간의 숙성 후에, 하나의 흐름이 된다. 산책하며 수집한 일상의 자잘한 조각들이 모여 ‘들짐승 같은 글’이 된다. 그 글에는 포맷도 형식도 없다. 출판사의 틀과 형식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녀의 글은 마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들판의 야생동물 같다.


“산책은 수집이다.” 그녀는 말했다. 달리기 대신 걷고, 걷다 보면 듣게 되고, 듣다 보면 감정이 들여다보인다. 글이 안 써질 때는? “스프링노트를 꺼내 아무 말이라도 쓴다.” “된장찌개 먹을까 말까?” 같은 말부터 시작하면 된다. 꾸준히 20페이지 이상 쓰다 보면 흐름이 생긴다.


한 번도 ‘완성된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글을 ‘잘 쓰지 않으려’ 애쓰면서 진심에 닿으려 했다. “안 쓰려고 노력하다 보니 쓰고 싶어졌어요.”


독일 철학, 동양 불교, 힌두교, 인도 구루, 오체투지, 명상, 진화생물학, 물리학까지 탐독했다. 모든 학문과 종교가 결국 하나의 진리, ‘말하고자 하는 것 하나’로 통한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종교는 신, 물리는 보이지 않는 우주, 뇌과학은 보이지 않는 뇌의 회로를 이야기하죠. 방식은 다를 뿐 본질은 같아요.”


술을 마시며 회피했던 시절을 지나, 슬픔의 굴레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고통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크기를 측정하고, 흐름을 읽는 연습을 했다. ‘이 슬픔은 3주짜리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감정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게 아니라, 공부하고 관찰하면 오히려 정리가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은, ‘진짜가 아닌 것’이라는 사실. “감정은 내게 온 것일 뿐, 나는 감정이 아니에요. 그냥 왔다 가는 거예요.” 그녀는 자신의 슬픔을 그렇게 ‘앉아서’ 바라봤다.


“글을 쓰며 수행하고, 멘탈 훈련을 하고 있어요.” 그녀에게 글쓰기는 표현의 수단을 넘어, 자신을 다루는 기술이고, 감정을 소화하는 도구였으며, 동시에 누군가를 위로하는 힘이었다.


“감정이 어떤 모양인지, 슬픔이 몇 퍼센트, 행복이 몇 퍼센트인지 알고 있으면 도망갈 필요가 없어요. 예측할 수 있는 감정으로 분류되면, 그 감정에 함몰되지 않아요.”


우리는 너무 자주 자아와 감정을 착각한다. 감정이 나라고 생각하지만, 감정은 나를 스쳐 지나가는 어떤 것일 뿐이다. 그녀는 감정과 자아의 거리두기를 훈련하며, ‘우울함이 지속되지 않는 상태’로 자기 자신을 회복시켰다. 과거의 모든 경험이 지금의 글을 가능하게 했다.


‘어둠과 빛의 완전체.’

그녀의 독자가 붙여준 별명이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다시 올라와야 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회색지대를 많이 만들어 두라고 말했다.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중간의 지층을 많이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덜 다친다고. 그러지 않으면 세상은 “친구 아니면 적, 남자 아니면 여자, 행복 아니면 불행”으로만 구획되고, 그 괴리는 결국 우리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고.


글을 쓰며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단점이라 불리는 성향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게 독자를 위로한다고 믿는다. “제 책이 많은 공감을 이유는 저처럼 특이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에요. 다만 아직 말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책은 로또 같다고 했다. 서점에 깔린 수만 권 중에 누군가가 내 책을 만나 확 꽂힐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하지만, 그 0.0001%가 있기 때문에 계속 쓰는 거라고. 독자는 냉정하다. 그래서 더 치밀하게 구성하고, 마지막 문장에 가장 강한 힘을 실으며 편집한다.


“글쓰기는 수행이에요.”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세상에 내보내는 과정이라고 했다. 혼자 글쓰기가 ‘숙제’라면 출간은 ‘수능 시험’이라고 했다. 그래서 꼭 한 번 해보기를 권했다.


북토크는 작가를 만나러 가는 자리다. 하지만 어쩌면, 더 정확히는 나를 만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안리타 작가는 북토크에서 나를 이야기했다.

나처럼 방황했고, 나처럼 아팠고, 나처럼 쓰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녀의 말이 곧 내 말처럼 들렸다.


글쓰기란, 자기 자신과의 비밀스러운 독대다. 그렇게 쓰인 글은 누군가에게 구겨진 편지가 아닌, 잊지 못할 위로가 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기록 역시, 어쩌면 누군가의 내면에 들불처럼 번질지도 모른다.


아직 쓰는 법을 몰라도 괜찮다. 내가 왜 쓰는지 몰라도 괜찮다. 그러니, 오늘도 조금씩. 하루에 1mm씩. 내 안의 들짐승과 즐겁게 산책을 하며, 다시 한 줄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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