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왔던 첫 해외 북페어
작년 가을, 대만 타이베이 아트북페어에 참가하기 위해 서른아홉 살 인생 첫 해외여행을 떠났다. 비행기는 구름을 헤치며 점차 서남쪽으로 향했고, 창밖엔 해무와 햇살이 뒤섞인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인천에서 타이베이까지 불과 세 시간의 남짓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반도 및 부속 도서를 벗어난 순간이었다. 3박 4일의 짧지만, 짜릿한 일탈이 시작됐다.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하자 익숙하지 않은 언어, 복잡하게 오가는 사람들, 알 수 없는 향기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여행의 첫걸음이 늘 그렇듯 불안과 설렘이 묘하게 뒤섞였다. 공항에서 지하철역,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조금씩 대만의 공기를 흡수했다. 현지인들이 주고받는 빠른 대화, 거리에서 퍼지는 음식 냄새, 스쿠터가 지나가며 남기는 바람이 여행을 실감 나게 했다.
타이베이 시내에 발을 디디자, 한자로 가득한 간판들, 빽빽한 건물 사이를 가르는 스쿠터 행렬, 어딜 가든 들려오는 부드러운 대만 억양의 중국어가 나를 둘러쌌다. 길을 잃을까 살짝 걱정도 됐지만, 대만 사람들의 친절은 상상을 초월했다. 편리한 대중교통과 가까운 거리, 한자 문화권이 주는 안정감 덕분에 초심자도 비교적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대만과 일본이 해외여행 입문 코스로 꼽히는 이유를 몸소 느낄 수 있었다.
‘草率季’(대충하는 계절)로 불리는 이 행사는 화산1914 문화창의산업원구 한복판에서 열렸다. 430여 개의 독립 출판사와 브랜드가 모여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진 축제의 장이었다. 한국을 비롯해 중국, 일본, 이탈리아 등 세계 곳곳의 나라에서 온 187개 브랜드의 크리에이터들이 함께하는 이 공간은 전 세계 독립 출판계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행사장에 들어서자마자 눈과 귀가 분주해졌다. 곳곳에서 K-pop이 흘러나왔고, 한국 인디 뮤지션 ‘데이 먼스 이어’의 라이브 공연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행사장 한쪽에서는 일본 ‘Xion Tokyo’의 디제잉 공연이 이어졌다. 디제이는 전자음악과 힙합, 노이즈, 펑크가 자유롭게 섞인 음악을 선보였다. 드로잉과 문신 아티스트가 즉석에서 작업하고, 주류와 음식 부스까지 어우러져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축제 분위기를 만들었다. 책이 매개이자 중심이었지만, 그 경계를 훌쩍 넘은 창작과 표현의 유기체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다.
첫날 일정이 끝난 뒤 근처 맥줏집에서 피자와 함께 가볍게 한잔했다. 국내 행사에선 보통 혼자 후다닥 숙소로 돌아가곤 했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꽃기린, 수박와구와구 작가님은 행사를 마치면 그날의 디스플레이 방식이나 독자와의 소통 방법에 대해 피드백을 나누었는데, 그 모습이 또 하나의 문화 충격이었다. 해외여행 첫날에 그냥 숙소로 돌아가기 아쉬워 피로를 풀러 다 함께 발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발 구석구석을 누를 때마다 온몸을 비틀며 괴롭게 신음하는 날 보고 직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받을 때는 고통스러웠지만 자고 일어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둘째 날 아침, 행사 참가 전 대만 국가도서관을 찾았다. 마침, 서지학 개론 수업을 듣는 중이라 ‘서지 로드’ 기말 과제 자료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곳은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에 해당하는 국가 거점 도서관이었다. 중국어는 못했지만 “한국에서 온 사서”라고 간단히 소개했다. 사서교사가 되기 위해 숭의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문헌정보학 수업을 듣고 있는 만학도라고 소개하기엔 너무 번거로웠다.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선생님이 직접 도서관을 안내해 주었다. 고서 자료실에서는 한국의 오래된 책을 보여주며 설명해 주는 사서도 있었다. 감사의 마음으로 내가 가져간 사진 미니북을 선물했다. 독립 출판이 단순한 취미나 유행이 아니라 세계와 소통하는 창구라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셋째 날 오전에는 국립타이완대학 도서관을 방문했다. 숙소와 행사장 근처의 도서관을 찾다 보니 마침 우리나라의 서울대와 같은 위상의 국립대만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크고 작은 원으로 이루어진 쿠첸푸 기념도서관을 기대하며 지하철을 타고 향했다. 국가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여권을 맡기고 자유롭게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입구의 AI 키오스크가 시설을 안내했고, 한국학 코너에서는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책들을 차분히 훑어봤다. 해외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더니, 그 말이 실감 났다. 서울대가 한국 최고의 대학으로 꼽히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매년 10만 권이 추가되며 축적된 527만 권이 넘는 장서. 130억의 운영비 중 100억 이상이 사용되는 자료 수집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국립대만대와 관련된 저자의 출판물을 아카이빙하는 ‘NTU Collected Works’에서는 모교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다. 도서관 밖에서는 거리 곳곳에서 책을 읽는 시민들을, 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을 마주쳤다. 타이베이의 여유로운 분위기에 조금씩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행사장으로 돌아와서 ‘사적인 사과 지적인 수박’ 부스에 머무르며 오후를 보냈다. 내가 직접 준비한 미니북을 선보이며 현지 방문객들과 교류하는 순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서툰 영어와 두 마디의 중국어 – 니하오[你好]와 쎄쎄[谢谢] –, 온갖 몸짓으로 내가 만든 책들을 소개하며 역동적인 흐름의 일부가 되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미소 지으며 대화를 나누던 순간들은 아직도 생생하다. 언어가 완벽히 통하지 않아도 책과 사진, 그리고 표정으로 소통하는 기쁨은 그 자체로 여행의 큰 선물이었다.
사진 찍는 것보다 눈앞의 순간과 사람들의 표정을 마음속에 담으려 애썼다. 덕분에 카메라 너머의 세계보다 더 깊이 있는 경험을 했다. 멋진 모자와 온갖 힙한 옷차림의 대만 사람들을 찍지 못한 건 조금 아쉬웠다. 초상권에 예민한 우리나라와 달리,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물어보면 흔쾌히 자세를 취하는 그들의 모습이 자유롭게 느껴졌다.
낯선 도시에서 혼자 음식 주문에 도전하고, 때로는 길을 헤매면서도 현지인들의 따뜻한 도움을 받았다. 이런 소소한 경험이 쌓여 여행은 더욱 풍성해졌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은 결국 나 자신과 더 솔직하게 마주하는 시간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다. 명동에 수업을 들으러 갈 때는 그들이 외국인이었지만, 대만에 온 이상 내가 그랬다. 그 사실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즐거웠다.
‘틀리지 않다(沒有錯)’를 표방하는 타이베이 아트북페어는 단순한 출판 행사를 넘어, 전 세계의 창작자들의 자유로운 표현과 문화가 만나는 융합의 장이었다. 타이베이 역사상 ‘가장 큰 노점’으로 기록된 이곳에서, 내 작품을 펼치고, 다채로운 창작자와 관람객들과 함께 호흡했다. 내 삶의 속도를 한 박자 늦추고, 소중한 순간을 더 깊이 음미하며 살아가자는 결심을 안겨준 경험이었다.
처음으로 떠난 해외 여행지에서, 낯설지만 활기찬 타이베이의 아트북페어는 지금도 내 마음 한 가운데 따뜻한 황금빛 기억으로 남아 있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첫걸음이었고, 더 넓은 세상으로 향하는 호기심의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