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다시
다시, 덕양중학교로 돌아왔다. 2년 전까지 출근길이었던 6호선과 경의선을 타고 한국항공대역에서 내렸다. 몇 해 전의 시간이 파도처럼 떠올랐다. 이곳에서 2년 8개월을 보냈고, 그 시간 동안 여러 계절의 색을 보았다. 학생들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봤던 벚꽃, 퇴근길 화전역에서 봤던 여름 구름, 겨울 아침의 소복하게 눈이 쌓인 운동장까지. 덕양중은 단순한 근무지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선생님도 아니면서, 누군가의 어른이 되기도 했던. 조금 이상하고 많이 따뜻했던 공간. 작년에는 아직 재학 중인 학생에게 강의 요청을 부탁했고, 올해는 감사하게도 재직 중인 쌤이 강의 제안을 해주셨다.
강의의 제목은 ‘덕양중학교에서 책 만들고 인생이 바뀐 이야기‘였다. 사진으로 가득 찬 PPT는 200페이지가 넘었다. 그 속에는 나 혼자가 아니라, 덕양중 학생들과 함께한 시간이 구석구석 쌓여 있었다. 책이 되는 과정은 결국 기록과 마음의 축적이니까. 그 축적의 과정을 이곳에서 배웠다.
학생들을 마주하고 서자, 조금 떨렸지만 금세 마음이 가라앉았다. 마치 오래전 친구와 다시 마주 앉았을 때의 기분이었다. 2021년 4월부터 2023년 12월까지 덕양중학교 교무실에서 주무관으로 근무했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필요를 대신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예산과 공문, 행정 절차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대학교에서는 사진을 전공했다. 지금은 사서교사가 되기 위해 문헌정보학을 배워 사서 자격을 얻었다. 조금 늦게 돌아간 길이지만, 그 길 끝에 새로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덕양중이 그 문 앞까지 나를 데려다준 셈이다.
강의는 자연스럽게 벽화 이야기로 이어졌다. 2022년과 2023년 여름방학에 미술부 학생들과 함께 그린 벽화들. 처음엔 텅 비어 있던 하얀 벽이었는데, 아이디어를 모으고, 구도를 잡고, 색을 고르자, 천천히 동화 속 장면이 됐다. 여름의 열기 속에서 땀을 흘리며 페인트를 바르던 학생들의 해맑은 표정이 기억난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무언가 탄생하는 순간은 늘 신비롭다. 그 벽화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쌓아 올린 여름의 기억과 닮았었다.
미술부 학생들은 나도 그려줬다. 연필로만 그린 초상화, 색연필로 칠한 그림, 섬세하게 포착한 파란색 줄무늬 넥타이까지. 한 학생은 나를 ‘다정하고 따뜻한 인간 난로’라고 표현했다. 지금도 그 말이 심장 어딘가를 뜨겁게 붙잡고 있다. 학생들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나는 어쩐지 실제의 나보다 더 온순하고, 더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다. 학생들이 내 안의 좋은 면들을 먼저 보아준 덕분이다. 그런 순간들이 나를 이곳에 머물게 했다.
사진부 학생들과의 마지막 송별회도 잊지 못한다. 내가 담당했던 사진부는 소규모였지만, 부원 하나하나가 너무 진하고 따뜻한 빛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날, 학생들은 귀여운 그림과 편지를 건네며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그 작은 조촐함 속에 담긴 마음은 사서교사를 꿈꾸게 만들어줬다. 학생들이 남겨준 그림과 글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렇게 쌓인 기록들이 모이면, 하나의 책이 됩니다.” 그 말은 사실 내 인생의 화양연화를 말해주는 문장이기도 했다.
곽재식 작가의 팬이었다. 2009년, 단독 저서가 없던 시절, 작가님의 초기 단편들을 직접 모아 『곽재식 단편선』을 300권 만들었다. 기획부터 제작, 편집, 홍보, 판매, 배송까지, 모든 공정을 혼자 했다. 그 책은 미국 듀크대 도서관까지 갔고, 한겨레와 카이스트 신문에 소개됐다.
덕양중에서는 ‘사글인’을 만들었다. ‘사진, 글, 인터뷰’라는 뜻으로, 1학년 자유학기제 때 학생들과 마을을 아카이빙한 인터뷰집이다. 패들렛에 남긴 글부터 동네 사람들과의 인터뷰, 마을 지도를 직접 그린 작업까지, 하나하나 모은 기록들이 책을 이루었다. “아카이브는 과거를 현재에 보존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재를 미래로 운반하는 기계이다.” 보리스 그로이스의 말처럼, 우리는 그 작업을 통해 마을의 역사를 미래로 건넸다.
졸업 앨범 사진을 찍고, 학생들과 함께 사진 수업을 하며, 학생들이 직접 디자인한 졸업 앨범이 세상에 나오도록 도왔다. 우리 손으로 만든 소중한 추억의 조각이다.
이 모든 경험은 나를 결국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여행 작가 수업을 듣고, 여행 에세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담아, 엮다’라는 글 모임에 나가 글을 낭독하고, 고치고, 이야기 나누었다. 글을 쓰는 일은 결국 삶을 조금 더 보듬어 보는 과정이었다. 소년원 청소년에게 책과 편지를 보내는 북멘토링 사업에 참여하며, 누군가의 어둡고 긴 시간을 함께 견디는 마음도 배우게 됐다.
계속 글을 쓰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는 글을. 브런치에 연재했고, 그렇게 쓴 글들을 엮어 『처음의 마음』이라는 산문집으로 만들었다. 곽재식 작가님이 추천사를 써주었을 때의 감동은 감히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책을 만들기 위해 독립 출판 수업을 들었고, 콘텐츠 기획부터 포토샵, 인디자인을 익혀 샘플북을 만들었다. 미니북 에세이 『가난? 난가?!』, 사진집 『행복의 진수』, 엽서북 『물색』 등 11종의 미니북이 세상에 나왔다. 그 책들을 들고 국내외 북페어에 참여했다. 타이베이, 도쿄, 후쿠오카, 그리고 이번엔 제주. 책이 나를 이끌어 간 여정이었다. 내가 책을 만든 게 아니라, 책이 나를 만든 시간이었다.
출판 플랫폼 인디펍에서 주간 판매 1위를 했을 때. 예스24 기획전에 소개되었을 때. 국립중앙도서관에 내 책이 비치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기쁨과 함께 ‘이 길을 계속 걸어도 되겠다’라는 확신 같은 것이 마음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오늘 강의를 마치고 교실을 나오며 문득, 2022년 여름 벽화 앞에 서 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의 나는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앉아 글을 쓴다. 어쩌면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내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는 사실일 것이다.
‘So again.’ 그래서 다시.
덕양중에 다시 섰고, 다시 책을 이야기했고, 다시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불씨를 건네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또 다른 여정을 향해 제주도로 향하고 있다.
누군가는 삶이 직선이라고 말하지만, 삶은 오래된 골목길 같다고 믿는다. 돌아가기도 하고, 같은 자리를 여러 번 지나기도 하고, 생각지 못한 곳에서 멈춰 서기도 한다. 그 길 끝에서 다시 만나는 자신은 언제나 전보다 조금 더 나아져 있다.
오늘 덕양중 교실에 서 있던 나는, 2년 전 그곳에 서 있던 나와 닮아 있었고, 동시에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책을 만드는 사람, 글을 쓰는 사람, 사진을 찍는 사람, 그리고 누군가와 기억을 나누는 사람.
기록하고, 만들고, 나누는 그 모든 마음의 끝에는 늘 같은 문장이 놓여 있었다
“사라져도, 잊히지 않는 시간을 만들고 싶다.”
책을 만들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고, 또 어딘가로 떠나는 이유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