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잡화점 885
<무조건 VS 조건부>
1.
“무조건 해주세요.”
벌써 가슴이 답답해진다. 나도 사정이 있는데 다짜고짜 무조건이라고 말하면 왕 부담스럽다.
사랑을 표현한다 해도,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을 건너 무조건 달려온다면 부담스러울 판이다. 모든 일은 주어진 조건이 중요하다.
2.
“머리 아픈데 타이레놀 먹어도 괜찮을까요?”
/“지금 몸 상태가 이러이러하시니 오늘은 드셔도 괜찮겠어요.”
“역시 두통에는 무조건 타이레놀이군요.”
/“네???”
꼭 이런 분들이 사고를 치신다. 술 과음하고 머리 아프다 할 때 겁도 없이 타이레놀 몇 알씩 툭 털어 넣는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간에 무리가 가면 정말 큰일 난다. 술 안 드셨을 때만 드시라고 약사가 분명히 설명했지만, 젊은 남자 분들 이렇게 말 안 듣다가 단 며칠 새 황망한 일 당한다. 앞의 여러 조건들은 다 빼고, 듣고 싶은 말만 재조합하면 악마의 편집이 되어 버린다.
3.
전제조건은 절대적이다. 그 원칙을 어기지 않는 범위에서 결정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눈앞의 변수를 잘 따지려면 전제조건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심사숙고하여 창업자금 규모를 최대 1억 원으로 정했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그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아쉬운 마음에 달라빚 사채로 3천만 원을 더 투입하면 망한다.
실수하는 이유는 전제조건과 변수를 헷갈리기 때문이다. 전제조건을 만족시켰다는 전제 하에, 주어진 범위 안에서 변수에 대한 결정권이 생긴다. 눈앞의 달콤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전제조건을 살짝 무시하는 순간 배는 산으로 향한다.
4.
처음부터 헷갈리는 사람은 없다. 다들 평소 맨 정신에는 똑똑한 사람들이다. 시작은 언제나 ‘이번 딱 한번만’이다. 타던 차를 바꿀 때는 차 계약과 동시에 보험부터 가입하지만, 제주도 여행을 가면 생각이 달라진다. ‘보험이 꼭 필수는 아니잖아?’
단 며칠 차를 타는데, 비싼 돈 내고 보험 들려니 너무 아깝다. 이번 한번만 그냥 보험 없이 타기로 한다. 어차피 집에서 운전할 때도 10년 동안 사고 한 번 난 적 없다. 이 참에 집에 가서 자동차보험도 해약해 버릴까 싶기도 하다. 바로 그 순간 끼이익 쿵. 슬쩍 박았는데 다시 보니 외제 스포츠카. 내차 앞차 수리비가 뜨악이다.
5.
“음, 오늘은 술많이 마셨으니까 약사님 말씀대로 타이레놀 먹으면 안 되겠네. 그래도 머리가 너무 아픈걸? 약먹고 물을 많이 마시면 괜찮지 않을까?”
전제조건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도로위 노란색 중앙선이다. 괜히 잔머리 굴리며 적당히 타협하고, 그런 식으로 한두 번 잘 넘어가면 점점 겁을 상실해 간다.
의사결정을 할 때는 전제조건과 그 부속 결정의 위계를 잘 지켜야 한다. 술 먹은 뒤 타이레놀 먹지 말라고 하면 절대 안 먹어야 한다. 한 알도 반알도 안 된다. 무조건 안 된다. 전문가의 조언을 듣거나 중요한 결정을 해야할 때, 맨 마지막 문장 선택권에만 밑줄 그을 생각하지 말라. 그 앞의 전제조건들을 더 확실히 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