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잡화점 887
<도대체 얼마나 길게 보아야 할까>
1.
“너무 실망하지마, 인생은 길어. 불합격했지만 길게 보면 결국 이득이니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해.”
그런 말 들어도 하나도 안 좋고 하나도 안 기쁘다. 18년 인생 살아오면서 가장 큰 좌절을 겪었는데, 길게 보라는 말이 위로가 될까. 살아보지 않은 사람한테는 아무 느낌도 없다.
2.
“아파트? 다 거품이야. 시멘트 철근 다 합쳐도 절대 그 가격 안 나와. 언젠가 결국 반의 반의 반값으로 폭락할테니 그때 사면 돼.”
아는 분 중에 부동산 거품론자가 계신다. 같은 논리로 백화점 명품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신다.
물론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815 광복이후 70년 넘게 주장이 안 맞았으면 이제 이론을 바꿀 때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앞으로 한 500년 더 지켜보면 기어이 그런 일이 일어날까. 내 생각이 틀렸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가장 쉬운 변명이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3.
어느 재벌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고속도로를 지나다 잘 생긴 땅을 발견하면, 즉시 차를 돌려 그 자리에서 계약한다고 한다. 부동산정보나 개발이슈보다 본인의 안목을 더 믿는다고 했다. 안 오르면 어떡하느냐고 물으니, “상관없어요, 아들 손자한테 주욱 물려주면 언젠가 기어이 오를 테니까요.”
보통 사람들은 투자를 하더라도 50년짜리 기획은 못한다. 90세 나이에 큰돈이 생긴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먹고 사는데 지장없는 입장이라면 ‘길게 보는’ 시간의 관점이 달라진다. 사람마다 주어진 처지에 따라 시간가치는 제각각이다.
4.
평균수명이 길어졌다 한들, 건강수명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여성은 14세에 초경을 하고 49세에 폐경을 한다. 60세가 지나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며 여기저기 잔병이 생기기 시작한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환갑잔치의 가치는 지금도 유효하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각자 자기 시계를 꺼내어 시간여유부터 잘 따져보아야 한다. 옆 사람에게 물어봐야 아무 소용없다. 서로 다른 시계를 가지고 있으니, 판단의 기준이 같을 수가 없다. 이 사람은 길게 보고 여유 있게 결정할 수 있지만, 저 사람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 수도 있다.
5.
“원장님, 한방에서 무슨 특별한 치료방법 좀 없을까요? 대학병원에서 말기 암 진단을 받은 뒤, 의학교과서와 영어로 된 논문을 붙잡고 하루 10시간씩 공부하시는 분이다. 이제 항암도 안 듣지만 각종 신의료기술까지 시도하시며 완치의 꿈을 버리지 않으신다. 나도 도움드릴 방법은 없고, 쓸데없는 치료 못하시도록 막아드리는 설득이 최선이다.
“저... 아들내외 손주들하고 해외여행 한번 못 가봤다고 하셨잖아요. 여행부터 좀 다녀오시죠?”
/“안돼요, 항암스케쥴에 차질 있어요.”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가 퇴짜맞았다. 한동안 뜸하시더니 아드님이 오셨다. 어느 날 밤 항암제 부작용으로 응급실에 가신 뒤 돌아가셨다고 했다. 결국 가족여행은 못 가셨다. 원래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른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오늘이 제일 젊다는 사실만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