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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르몬닥터 권영구 Aug 08. 2023

@소통잡화점 907 <타인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수있을까

@소통잡화점 907

<우리는 타인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     


1.

“멀리서 소개받고 왔어요, 잘 좀 치료해 주셔요.”

새벽 첫차타고 저 멀리 남도 끝에서 산넘고 물건너 올라오신 분이다. 이런, 진료전설문지 적으신 내용을 보니 어마어마하다. A종합병원, S종합병원 두루 거치며 이미 수술도 여러 번 하셨다. 본인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으며, 나의 진료까지 받아보려고 오셨다.     


2.

나는 해리포터가 아니다. 안 되는 일을 되게 할 재주는 없다. 환자분 눈치를 가만히 살핀다. 지금 내가 퇴짜를 놓아도, 또다시 누군가를 찾아 기어이 무슨 치료라도 하실 기세다. 오늘은 휴가전 마지막 진료일이라, 마무리 처리할 일들도 많다. 그래도 할 수 없다. 흰 종이와 펜을 꺼낸다.     


“그 동안 인터넷 많이 찾아보시고 병에 대해서도 잘 아시네요. 지금 큰 병 2개를 동시에 치료하는 중이신데, 남들은 둘 중 하나만으로도 너무 힘들어 할 만한 큰 병들입니다. 지금은 불편한 증상을 고칠 때가 아니라, 그 두 가지 병을 잘 치료하고 각각 졸업부터 하셔야 해요. 엉뚱한 치료가 겹치면 그 병들 치료에 방해가 됩니다. 졸업하고 오시면 나머지 증상들은 제가 잘 치료해 드릴게요.”     


3.

30분 동안 열변을 토했다. 말없이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한마디 꺼내신다. 

“안 그래도 원장님이 못 고친다고 하셔서,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 중이었어요. 약을 쓰시지도 않는다면서 이렇게 까지 설명을 해 주시네요. 이런 설명은 처음 듣습니다. 원장님 말씀을 들어야겠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물론 항상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손가락이 아프다고 오신 환자분 관절모양이 심상치 않다. 통증관리와 별개로 류마티스 검사후 치료약을 따로 드셔야 할 듯싶어 길게 설명을 드렸다. “어휴, 됐어요 됐어. 검사 하나라도 더 시키려고 안달이시네.” 검사나 약물치료는 정형외과에 가서 하셔야 한다고 알려드렸지만 욕만 먹는다.     


4.

만일 나의 이익과 관계되는 내용이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못한다. 내 생각에 한약을 써야만 좋아질 환자라는 생각이 들어도, 그럴 때는 말을 아끼는 편이다. 상대가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훨씬 많아서 그렇다. 대신 나와 상관없는 내용에 대해서는 환자 분을 위한 열정을 마음껏 터뜨린다.      


따로 진찰비를 더 받지도 않지만, 잠시라도 옷깃을 스친 인연에게 좋은 일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그러려고 한의사를 한다. 이해타산 상관없이 내가 아는 지식과 판단력으로,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 과정에서 버는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잘먹고 잘사니, 돈돈돈 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5.

환자분을 대할 때마다 늘 고민한다. 나는 환자분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해야 할까. 간혹 주위 사람들이 

내게 건강에 대한 질문을 하고는, 내가 제시한 솔루션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다. 내 설명이 부족했을까, 스펙이 부족해서일까, 한의사라는 한계일까, 여러 가지 고민을 하게 된다.     


나에 대한 불신이면 그래도 괜찮다. 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은 내가 감당해야 한다. 내가 그 동안 놀면서 지내지는 않았는지, 내 예상이 들어맞을 때가 더 많아서 걱정이 된다. 차라리 내가 틀렸으면 좋겠다. 나중에라도 안 좋은 소식이 들리면 괜한 죄책감을 느낀다. 늘 머리가 복잡하고 지칠 수 밖에 없다. 좀 쉬어야 살겠다 싶은데 마침 휴가다. 1주일 쉬고 다음 주 수요일에 컴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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