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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르몬닥터 권영구 Dec 08. 2023

@소통잡화점 990 <끼워 맞추기 전법>

@소통잡화점 990

<끼워 맞추기 전법>     


1.

“그 나라 여행가기에 좀 위험하지 않나?”

/“요즘은 치안이 많이 좋아져서, 소매치기도 거의 없대.”

“그래도 그렇지, 그 나라가 하루아침에 확 바뀌겠어?”


이런 대화는 쉽사리 끝나지 않는다. ‘그래, 네 말대로 그 나라는 너무 위험해서 절대 가면 안 되지.’ 완전히 인정할 때까지 상대방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2.

어떤 생각이 마음속에 강렬하게 꽂히면, 그 주위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 이를 ‘닻내림효과(anchoring effect)’라고 한다. 배가 정박할 때 일단 닻부터 내린다. 제 아무리 강력한 태풍이 몰아쳐도 배는 그 언저리에 잘 고정되어 있다. 사람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한번 강력하게 필을 받으면, 그 어떤 정보를 새로 듣더라도 계속 처음 그 개념 주위로만 맴돈다.     


처음 떠오른 이미지는 그저 어설픈 선입견의 산물이었다. 대화를 이어가면 갈수록 점점 자기 확신이 강해진다. 내 말이 틀렸다는 데이터 수백 개는 눈에 안 들어오고, 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아무개의 멘트 하나에 밑줄 좍 긋는다. 확증편향이다. 이처럼 ‘닻내림효과’는 ‘확증편향’을 거름삼아 무럭무럭 자란다.     


3. 

“열이 많이 나셨다구요? 코로나 검사는 해보셨어요?”

한동안 대한민국 모든 의료진은 코로나의 트라우마에 사로 잡혔다. 갑자기 고열이 나는 병은 수도 없이 많지만, 대다수 의료진은 무조건 코로나부터 떠올렸다. 그러다가 진짜 원인을 한참 뒤에야 발견하게 되어,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떤 환자분 말씀에 의하면 코로나와 너무 다른 증상인데도, 담당의사가 무조건 코로나만 고집했다고 한다. 한번 코로나에 꽂히면 전부 코로나 증상으로만 보인다. 경험 많은 의료진은 대부분 명의소리를 듣는다. 그러다 척보면 다 안다는 식으로 잘못 빠지기 시작하면,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4. 

팀장님은 평소 김대리 근무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팀장님에게 김대리는 그저 뺀질거리는 직원이다. 누군가 지난번 프로젝트에서 김대리가 올린 성과를 칭찬하면,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다. 업무과정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김대리가 깜빡한 내용을 기어이 찾아낸다. “거봐, 김대리는 그런 사람이라구.”     


팀장님 기억에 남아있는 오래전 사건은 분명 김대리 잘못이 맞다. 그 이후 개과천선하여 업무력과 대인관계 모두 엄청 좋아졌다고 한다. 몰랐던 사실을 새로 알았으니, 판단을 바꾸면 그만이다. 이 과정이 그리도 힘들다. 새로운 판단을 하려면 이전 생각이 틀렸다고 인정해야 한다. 사람은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도 자신에게 결함이 있다는 사실만은 죽어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5.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연인에게 의심의 눈초리가 한번 생기고 나면, 좀처럼 극복하기 어렵다. 무슨 말이든, 무슨 행동이든 다 거짓으로 느껴진다. 초창기 콩깍지 시절에는 정반대였다. 말도 안 되는 아재개그에 깔깔거리며 웃어주었고, 남들이 그 사람 이상하다고 말해도 무한신뢰를 이어갔다.     


사랑이 왜 변하느냐고 묻기 전에, 사람이 왜 안 변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루하루 성장하고 발전한다. 그렇게 어이없는 생각을 했던 나는, 이미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과거의 내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꾸 고집부리며 끼워 맞추려고만 하면 더 이상 발전은 없다. 나는 매일매일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어제의 나는 사뿐히 즈려밟고 지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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