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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르몬닥터 권영구 Jan 19. 2024

@1015 <일기를 쓰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1015

<일기를 쓰지 않는 자에게 미래는 없다>     


1.

“이번에 입맛 까다로운 바이어 접대하느라 김대리가 고생 많았어요.”

/“죄송합니다, 작년 이맘때 저 바이어 갑각류 알레르기에 대해 들은 기억이 나는데 제가 깜박했네요.”

“그럼 이번 접대 보고서에는 그 이야기 기록했나요?”

/“아차, 아직...”

실수는 대개 한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실수가 아니라 실력일 때가 많아서 그렇다.     


2.

누군가 당신에게 원고 청탁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살아오면서 큰 영향을 받은 위인이나 책에 대해 칼럼을 써달라고 한다. 100개도 좋고 10개도 좋고 1개라도 상관없다고 했다. 이때 당신이 서점으로 달려가거나 인터넷 검색을 시작한다면 어딘가 크게 잘못되었다.      


당신에게 의미 있는 자료는 당신만이 안다. 그때 어느 부분에서 어떤 감동을 느꼈는지, 남들은 전혀 알 수 없다. 어딘가에 적어 놓거나 정리를 해두었어야 이럴 때 바로 손이 간다. 그저 감명 깊게 읽은 책의 제목만 겨우 말할 정도라면, 당신만의 보물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밑줄 좍 긋고 여백에 메모라도 남겼어야 당신의 생각이 떠오른다.     


3. 

초등학교 시절에는 강제로 매일 일기를 썼다. 개학 전날은 언제나 난리통이었다. 신문을 뒤져 날씨부터 복기한 뒤, 밤을 새워가며 일자별로 다른 소설을 쓴다. 나중에야 깨닫는다. 일기는 그리 거창한 프로젝트가 아니다. 일정을 순서대로 다 기록할 필요도 없다. 오늘 하루 어떤 생각과 느낌이었는지 내 존재의 흔적만 남기면 충분하다.      


출장 보고서를 써오라고 해도 사람마다 각양각색이다. 김대리는 초등학교 일기 수준이다. 몇 시에 기차를 타고, 어디서 밥을 먹었다는 말만 잔뜩이다. 함께 다녀온 장대리의 코멘트는 좀 다르다. 다음 출장에는 기차대신 고속버스를 타는 편이, 현지 스케줄을 소화하기에 더 편하겠다는 의견까지 써 온다. 똑같은 업무를 하더라도, 어디나 깨어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      


4. 

“맞아요, 매사에 철저하게 준비하고 기록하고 그래야죠.”

열심히 집중하지 않는 상대에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하며, 그 존재의 가벼움을 도저히 못 참는 사람도 있다. 무거운 삶을 원하든 가벼운 삶을 택하든 본인 자유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다만 기록하고 기억하는 행위가 삶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임은 알아두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영화의 어느 한 장면이 내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그 순간을 기억하고 돌아보며 

자신의 삶을 가꾸어 나가려는 사람은, 서서히 기억이 흐려지도록 절대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글자로 닻을 내려 단단히 고정시킨다.     


5. 

김대리 행동은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 바이어의 알레르기를 적어 놓으라는 지시를 놓친 단순실수일까. 그렇다면 지금 질책을 듣는 그 순간, 당장 어딘가에 부리나케 메모라도 했어야 한다. 멀뚱멀뚱 가만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말은, ‘그런 내용까지 다 기록해가면서, 인생 피곤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인드의 표현이다.

     

어떤 의료진은 챠트 내용이 텅텅 비어있다. ‘요통’, ‘감기’, ‘비염’ 병명만으로 끝이다. ‘비염으로 환절기마다 코가 간질거리면서 맑은 콧물이 나오고, 밤에 잘 때 목뒤로 코가 넘어가면서 기침하느라 깨기도 하심. 코감기라고 잘못 알고 계시길래 비염과 감기는 다르게 대처해야 한다고 자세히 설명드림.’ 지금 막 다녀가신 비염 환자에 대해 또 나만의 일기를 썼다. 나는 이렇게 살기로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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