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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르몬닥터 권영구 Apr 03. 2024

@1068 <내 말을 남이 전하면 감정까지 통역이~

@1068

<내 말을 남이 전하면 감정까지 통역이 될까?>     


1.

“김대리 아직 안 나왔나요? 어제 퇴근할 때 기침하면서 안색이 영 안 좋던데 걱정이네요. 이대리가 연락 한 번 해보세요. 힘들면 병가 내고 하루 쉬라고 하시구요.”

나중에 우연히 들으니 김대리가 팀장님한테 무척이나 서운했다고 한다. 중간 연락책 이대리가 화근이었다. “김대리, 팀장님이 몸 괜찮으면 빨리 튀어오래.”     


2.

말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면 아니 옮긴 만 못할 때가 많다. 중간에 끼인 이대리를 거치면서 처음 말을 꺼낸 팀장님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평소 김대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이대리의 숨은 속내가 덧씌워져 졸지에 팀장님이 피도 눈물도 없는 최악의 빌런이 되어 버렸다.     


“김대리, 왜 그렇게 나한테 화가 났어요. 어제 이대리가 전화할 때 뭐라고 했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사건의 맥락이 자연스럽지 않다 싶으면 일단 수사에 들어가야 한다. 이대리는 중간에 자기가 개입한 사실이 설마 들킬까 싶었다. 이렇게 당사자끼리 사실관계를 확인하면 빼도 박도 못하고 딱 걸린다.    

 

3.

당사자끼리 말 꺼내기가 껄끄러울 때 사이에 메신저를 끼우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내 말을 대신 전해주니 세상 편하고 좋다. 어려운 사람과 직접 얼굴 보고 미주알고주알 길게 말 섞지 않아도 되니 스트레스도 안 받는다. 대신 메신저의 역량과 의도에 따라 상황은 180도 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 장인 장모와 사위의 대립, 양가 어르신들의 반목은 사이에 낀 사람 잘못일 때가 많다. 주로 전해야 할 말은 전하지 않고 전하지 말아야 할 말만 전해서 그렇다. 메신저가 토씨 하나 안 빠뜨리고 미묘한 표정 변화까지 생생하게 악의적으로 전달하면 잉꼬부부도 이혼시킬 수 있다.     


4.

봉준호 감독의 세계적 명성에는 통역을 맡은 샤론 최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봉감독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섬세한 봉테일의 터치까지 아주 맛깔나게 소개했다. 가끔 봉감독이 애매하게 말하고 적당히 넘어가는 순간 마저 오히려 샤론 최가 더 재미있게 잘 전달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샤론 최의 뛰어난 센스와 영어실력은 큰 박수를 받았다. 나는 봉준호 감독의 안목이 더 놀랍다. 본인도 영어를 잘하지만 샤론 최를 일부러 내세웠다. 전달하고 싶은 미묘한 뉘앙스 하나까지도 언어의 한계 속에 변질되거나 사라지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샤론 최 아니 봉감독의 치밀한 계산 덕분에 세계인들은 그의 위대한 능력을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5.

“그런 말까지 내가 직접 해야 되나요? 회사에서 대신 사과 좀 해주세요.”

메신저를 내세우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사과하는 자리다. 실수나 잘못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할 상황은 그 누구라도 반갑지 않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고 대행사가 알아서 수습해 주길 기대한다. 그러다가 꼭 불에 기름을 붓는다.     


좋고 기쁜 일은 남을 통해도 상관없다. 결혼식은 사정이 있어 불참하더라도 친구를 통한 부조금 액수 만으로 내 진심을 충분히 전할 수 있다. 안 좋은 멘트일수록 직접 만나 여과 없이 내 진심을 전달해야 한다. 훌륭한 통역자가 끼면 예정된 싸움도 말릴 수 있겠지만, 내 마음을 겉으로 드러낼 최고의 전달자는 어디까지나 바로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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