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법칙024
"한평생 무조건 착하게만 살았는데..."
진료를 받으러 오신 40대후반 김재희님(가명)은 아들 2명을 키우며 회사생활까지 같이 하시는 대단한 워킹맘이십니다. 회사에서는 능력있는 팀장으로, 가정에서는 부드러운 엄마이자 아내로... 누가봐도 훌륭한 인생을 살고 계시네요.
보통 이런 경우 너무 바쁘게 지내시느라 체력이 떨어져 보약을 쓰러 오시는 경우가 많지만, 이 분은 조금 특별합니다. 오랜 진료끝에 제가 내린 진단명은 다름아닌 '화병'이었으니까요.
"어릴때부터 착한 어린이가 되라고 배우며 자랐어요."
학교끝나고 집에 오면 수학숙제부터 마무리하고, 식탁에서는 나물이나 야채까지 싹싹 비웠으며, 밤 10시면 3분 양치질후에 코 주무셨다고 합니다. 무려 초등학생이 말이죠.
이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가만 있으라'.
지금껏 윗사람이 시키면 무조건 순종하고 따르며 다른 의견이나 질문을 하지 않을 때만, 우리는 '착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아지 메리가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며 대들지 않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유교의 흔적일 수도 있고 상명하복 군사문화의 영향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착하다'는 말 속에는 강자와 약자가 숨어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선생님이 학생에게, 팀장님이 직원에게는 착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거꾸로 말하면 큰일납니다. 갑은 규칙을 정하는 사람이고, 을은 그 규칙을 순순히 잘 따라야만 칭찬을 받기에 그렇습니다.
착하게만 살아온 40대팀장 김재희님에게 몇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1. 순종적이다.
착하면 거절할 줄 모릅니다. 거절은 커녕 본인입장을 설명하고 절충하는 것도 큰 부담입니다. 남편이 저녁식사후 TV앞으로 순간이동을 해버려도, 시부모님이 명절에 아무도 안먹는 전을 부치라고 하셔도, 고등학생 아들이 소파구석에 양말을 꼭꼭 숨겨놓아도 조용히 순종합니다.
"남편이나 아이들에게라도 편히 이야기해보시지 그러셨어요?"
/"남편이 싫어하면 어떡해요?"
한번 '착한사람 타이틀'을 얻고 나면 쉽게 내려놓기 힘듭니다. 심지어 이 정도를 못 견디면 착한사람 칭찬을 들을 수 없다는 자기기준까지 만듭니다. 가족모임에서 냉면집에 가기로 하면, 찬음식 먹을 때마다 배아프고 설사한다는 사실을 숨긴 채 꾸역꾸역 드십니다.
'나 하나 참으면 다 행복해질꺼야.'
2. 선하다.
착하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착하다의 반대말은 '악하다'이고, 착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악당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지금이 중세암흑기도 아니고 절대선이나 절대악은 없지만,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습니다.
"착한 행동을 안하면 남에게 피해가 가쟎아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상은 선악 이분법만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착하지 않고도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보통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3. 억울해도 참는다.
착하면 억울합니다. 본인이 옳고 상대가 잘못했더라도 착한 사람이 되려면 참아야 합니다. 그 억울함이 계속 자라면 어느새 '화병'이 됩니다.
화병은 남을 먼저 생각하는 착한 사람에게 생깁니다. 남눈치 안보고 남신경 안쓰면 화병따위는 생기지 않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만큼 보상받지 못할 때, 최소한의 권리주장조차 못할 때 피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 * *
저는 딸에게 '착하게' 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헷갈리지 않도록 '착하게' 대신 다른 표현을 씁니다.
"맹목적 순종 대신 예의있게 자존감을 지키는 사람,
막연한 선한 대신 따뜻하게 나눌 줄 아는 사람,
한맺힌 억울함 대신 정당한 이의제기를 하는 사람,
그렇게 하면서 "따뜻한 마음"만 잘 간직하면 된단다."
감사합니다.
권영구원장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