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기를 배우는 중입니다

화와 슬픔, 그리고 인생의 기본기에 대해서

by 티아

계산을 하려면 사칙연산부터 할 줄 알아야 한다. 글을 쓰려면 단어와 단어를 연결할 줄 알아야 한다. 한국어를 하려면 자음과 모음부터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태극권을 하려면?




태극권을 한 지 10년이 넘은 고수들 사이에서 허우적대고 있자니 이게 맞나 싶다. 알고 보니 태극권은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이 따로 나뉘어 있지 않다. 내가 너무 '처음부터'를 고집하는 것일까. 처음부터 하나씩 쌓아서 빈틈없이, 완벽하게, 숨 막히게… 그러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 그냥 하자, 라고 생각하지만 이분들과 나의 동작은 백 번 양보해서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어르신들이 다리를 벌리면 나는 개다리춤을 추려고 준비하는 것 같다. 어르신들이 두 손을 머리 위로 펼치면 나는 눈이 부셔서 햇빛을 가리는 것 같다. 손바닥을 가슴 앞으로 밀어내면 나는 하면 경찰 앞에서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것 같고 양팔을 뻗고 몸통을 돌리면 나는 강시 같다. 그대로 콩콩 뛰어가면 바로 홍콩 영화의 강시3 역할을 따낼 수 있을 것이다.


태극권 동작은 그 자체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다). 속도도 매우 느리다. 하지만 그 느낌적인 느낌을 표현하기가 어렵다. 각 동작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고 기는 어디로 어떻게 흘려보내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전신 거울을 보며 태극권을 춰 보는데 그 모습이 세기말 로봇 같다.



태극권에도 기본기가 있다. '기본공(基本功)'이라고 부른다. 기본공 중에서도 기본이 '태극보(太極步)'이다. 태극권을 할 때 기본이 되는 걸음걸이를 말한다. 날씨가 추워서 연습하러 나오는 사람이 적은 날에는 린 아저씨가 직접 태극보를 가르쳐 주셨다. 발바닥은 90도와 45도 각도를 반복하고 무게중심은 오른발과 왼쪽을 왔다 갔다 한다. 이런 식으로 앞으로 이동하는데 이때 발의 뒤꿈치와 앞꿈치를 들어가며 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발뒤꿈치와 사타구니까지 연결된 선을 느끼면 좋다. 무릎의 힘으로 쿵쾅 거리지 않고, 고양이처럼 사푼사푼 걷는다.


린 아저씨는 10년 이상 태극권을 한 고수이지만 아마 가르쳐 본 경험은 많이 않을 것이다. 내 동작이 어딘가 다르다는 것은 보자마자 알아차리셨겠지만 어디부터 교정해야 하는지는 그도 모르는 듯하다. 발을 앞으로 뻗을 때 발바닥을 일자로 놓아야 하는데 내 발은 자꾸 5도 정도 틀어졌다. 왜 발 하나도 제대로 놓지 못하는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내가 몸 쓰는 법을 배운 적이 있던가?


초등학생 때 학교 수련회나 축제 때 아이돌 춤을 추는 것이 유행했다. 당시 나도 춤에 관심이 생겨서 집에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연습해 보곤 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앞부분 몇 동작도 제대로 따라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손과 발이 따로 놀고, 팔을 올린 다음에는 다리를 벌려야 했던지 고개를 올려야 했던지 순서가 기억나지 않았다.


운동이나 춤으로 성적이 매겨지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했던 때가 이때였다. 물론 나는 그 말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왜 성적은 암기로만 매겨지지? 신체 능력도 지능인데." 괜한 말을 했다가 모두가 맞아 맞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일이 커져 버리면 나는 이제 어떻게 대학에 간단 말인가? 나는 운동이나 춤도 지능이라는 것을 최대한 숨겨야 했다. 교육부에서 올해부터 웨이브 잘 타는 순서로 성적을 매기겠다고 하면 그날부터 나는 밑바닥을 깔아주는 학생이 되는 것이었다.




인생에도 기본기가 있을까? 할 줄 안다면 인생이 더 편안해지는 기술이 있을까? 어차피 답이 하나는 아닐 것 같으니까 내가 먼저 말해 본다. 나는 '화 다스리기'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가능하다면 늘 기분이 좋아야 한다고 믿는다. '기분'은 기운 기(氣) 자와 나눌 분(分) 자를 쓴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 기운을 나눠줄 수 있지만 기분이 나쁘면 나쁜 기운을 나눠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좋은 기분을 가장 쉽게 망치는 것이 화(火)다.


우리는 모두 화가 나 있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이 땅에 처음 왔을 때부터 화가 났고 지금도 화가 난다. 왜 화가 나느냐에 대해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답한다. "슬퍼서." 분노 아래에 슬픔이 있다.


슬퍼서 화가 난다.

화는, 슬픔의 다른 얼굴이다.


엄마가 아이에게 밥 먹으라고 말한다. 아이는 게임하느라 오지 않는다.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화를 내기 시작한다. 엄마는 화가 나는 동시에 슬프다.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슬픔의 이유는 인생이 내 맘 같지 않고 또 그런 인생을 바꿀 만한 힘이 자신에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생각 같아서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도 김영하 님 뺨치는 유명 작가가 되어서 부와 명예를 양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너무 유명해져서 헤어진 남자친구한테서 "잘 지내지?"라는 연락도 받고 회사 그만둔다고 비웃던 사람들에게서 시샘도 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 모른다. 메일함에 출판사의 거절 편지가 쌓여 있기는커녕 거절받을 원고조차 쌓여 있지 않다. 거절도 도전한 사람이나 새길 수 있는 흔적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자. 만약 생각과 현실이 정확하게 일치한다면 어떨까? 10억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자마자 통장에 10억이 입금된다면? 절대 화가 나지 않을 것이다. 대자연에 고마운 마음만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10억은 입금되지 않고, 그게 문제다. 생각과 현실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더 화가 난다. 화는 가랑비에 속옷까지 젖듯 인생을 좀 먹는다. 화를 다스리려면 생각을 바꾸거나 현실을 바꿔야 한다.




작년 건강검진 결과에서 염증 지수가 높다는 결과를 받았다. 염증 지수가 높아서 백혈구도 정상보다 많았다. 기분이 나빴다. 야식도 안 먹고 밥도 건강하게 먹고 몸무게는 정상체중에 닿지도 않는데, 이런 내가 왜 염증 지수가 높지? 이런 건 밤마다 엽기떡볶이 국물까지 싹싹 긁어먹고 담배 피우고 소주 빠는 애들이나 걸려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계속 억울해해 봐야 바뀌는 것도 없고 점점 더 슬퍼지기만 했다. 나는 생각을 바꾸거나 현실을 바꿔야 했다.


우선 생각을 바꿨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에서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없어야 하지?'라고 생각을 바꿨다. 고흐는 그토록 많은 작품을 그렸는데도 평생 동안 딱 한 점의 유화만 팔았다. 진짜 거지 같은 인생은 내가 아니라 고흐다. 나 같았으면 화판만 보면 속이 뒤집어져서 집에 있는 붓 다 꺼내서 집 밖에다가 내동댕이 쳤을 것이다. 그런 고흐도, 천재 고흐도 그냥 그렸다. 계속 그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행운만 오고 불행은 비껴간다는 게 말이 되나? 객관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다음으로는 음양을 생각했다. 세상에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다. 음과 양뿐이다. 좋다, 나쁘다는 인간이 거기에 추가한 감상이다. 염증 지수가 높은 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다. 염증 때문에 쉽게 피곤해지고 음식도 가려먹어야 하지만 지금 한번 좋은 식습관을 길러 놓으면 나는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나중에는 "그때 염증 수치가 높았던 덕분에..." 하면서 웃을지도 모른다. (도저히 상상은 안 가지만)


생각을 바꾸면서 행동도 바꿨다. 과자를 끊었고 지금처럼 운동을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도 화를 다스리기 위해서다. 비록 유명 작가는 아니지만 나 나름대로는 진지하게 글을 쓰고 읽고 읽어주는 사람도 조금 있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서 흙속의 진주처럼 발견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분명 세상에 화가 날 것이다.


태극권에서도, 인생에서도 기본기를 익혀가는 중이다.

앞으로의 삶이 더 수월해질 것이라 믿으면서.





기분이 좋아야 한다.

기분이 좋으려면 ‘옳고 그름’을 내려놓아야 한다.

기분이 좋으려면 행동해야 한다.

나에게 이 셋이, 인생의 기본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