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증

by 방덕붕

*** 이 소설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명, 인물, 스크립트, 음성, 회사, 단체, 지명, 국명, 사건, 제품,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전부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수진은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진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안함이 가득했지만, 수진의 마음은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정말 마지막이야. 다시는 걔랑 연락하지 않을게."

진호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하지만 수진은 이미 들어봤던 말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째였다.


"하아... 일단 알겠어.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호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또 한 번 넘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수진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조용히 핸드폰을 꺼냈다. 그 여자의 전화번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진호의 핸드폰을 몰래 확인했을 때 저장해둔 것이었다.

전화벨이 몇 번 울린 후,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진호씨 현재 여자친구예요."


수진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통화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긴장이 됐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에 다리마저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전화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아... 네."

"직접 말씀드리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이제 더 이상 진호씨와 연락하지 마세요."

긴장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침착하게 말했지만 이미 손은 떨리고 있었다.


"알겠어요. 사실...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상대방 여자의 목소리에는 의외로 적대감이 없었다. 오히려 지친 듯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어왔거든요. 목포에서. 그런데 걔가 서울에 간 후로 연락도 뜸해지고 그리고... 여자를 정말 많이 만나더라고요. 이제 지쳤어요. 그쪽이 알아서 하세요."

수진은 당황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할 줄 몰랐다.

"그... 그럼 됐네요."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상대방이 다시 말했다.

"그런데... 저... 하나만 물어볼게요."

"네?"

"걔 고등학교 때 공부도 잘 못했는데... S대 나온 건 맞데요?"

수진의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뭐라구요?"

수진은 더 이상 듣지 못하겠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진호는 분명히 S대 법학과 졸업이라고 했었다. 부동산 회사 법무팀에서 일한다고 했다.

8개월 동안 모든 게 거짓말이었던 건가?

카페로 돌아온 수진은 진호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의 얼굴이 여전히 미안해하는 표정이었지만, 이제는 모든 게 가식으로 보였다.

"야!"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수진이 조용히 말했다.

"응?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너 정말 S대 나왔어?"

진호의 얼굴이 순간 경직됐다.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야... 너 진짜 S대 법학과 맞아?"

"무슨 소리야.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그럼 앱 열어서 졸업 증명서 떼 봐. 지금 당장."

"그... 그건... 처음 만났을 때 보여줬잖아... 하도 S대라고 사기치는 사람들이 많아서..."

"회사 명함은?"


진호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수진은 확신했다.

"다 거짓말이구나. 명함은 인쇄소에서 찍었고, 졸업장은 위조했니?"

"수진아, 들어봐..."

"듣기 싫어.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야?!!!"

진호의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 카페 안의 다른 손님들이 수근대고 있었다.

"미안해. 처음에 너를 만났을 때 너무 완벽해 보여서... 나도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싶었어."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싶었던게 아니라 날 만나기 전부터 사기칠 준비를 한거 아니야!!!"

"직장은?"

진호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지금... 일하고 있지 않아."

수진은 허탈하게 웃었다. 학력도 거짓말, 직장도 거짓말. 바람까지 피우는 남자와 8개월을 사귄 것이었다.

"그럼 내가 빌려준 돈은?"

진호의 얼굴이 더욱 파래졌다.

"그건..."

"회사에서 실수해서 손실 입혔다고, 급하게 필요하다고 그랬잖아. 백수인데 무슨 회사 손실이야?"

"수진아, 정말 미안해. 꼭 갚을게..."

"뭘로 갚아? 일도 안 하는데?"

수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다른 테이블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학력이나 직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거짓말이 문제였다.

"8개월 동안 거짓말로 사귄 거야? 학력, 직장, 심지어 돈까지 속여서 뺏어간 거야?"

"아니야, 너를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진짜였어."

"사랑이 진짜였으면 거짓말 하지 말았어야지. 이천만원 어떻게 할 거야?"

"꼭 갚을게. 시간을 좀 줘."

"무슨 시간? 일도 안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돈이 막 생기니?!!!"

수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다시는 연락하지 마. 그리고 돈은 꼭 갚아. 혼인빙자 사기로 콩밥 먹기 싫으면. 법대 졸업생 코스프레 했으면 뭐가 어떻게 될지는 눈치로 알아야 하는 거 아냐?!!!"


그날 밤, 수진은 오랫동안 생각했다. 8개월 동안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학력, 직업, 그리고 2천만원이라는 거금까지.

회사에서 실수로 손실을 입혔다며 울면서 부탁하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접근한 것부터가 처음부터 계획적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여자와 통화하지 않았다면? 수진은 아마 계속 속고 살았을 것이다. 더 많은 돈을 빼앗겼을 수도 있었다. 이천만원은 큰 돈이지만 수진의 부모님 재력에 비하면 푼돈에 지나지 않았다.


며칠 후, 수진의 친구 은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수진아, 진호씨랑은 잘 만나고 있어? 요즘 어때? 잘 지내지? 한 번 같이 만날까?"

은지의 남자친구 상민과 진호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어릴 때는 친했지만 중학교 때 각자 다른 학교로 가면서 소원해졌고, 성인이 되어서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됐다. 상민은 진호가 S대를 졸업해 큰 부동산 회사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서로의 근황을 자세히 알지 못했던 상황에서.

"헤어졌어."

"아, 왜? 사귀는 줄 알았는데."

"학력도 속이고, 직장도 없으면서 거짓말했어. 게다가 돈도 2천만원이나 빌려갔어."

"뭐?! 2천만원? 뭘 하려고?"

"회사에서 실수했다고 거짓말했어. 근데 애초에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었지."

은지도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상민이가 완전히 속은 거네? 상민이도 진호가 S대 나왔다고 진짜 믿고 있었거든."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전 여자친구가 알려줬어."

수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러니했다. 자신이 질투했던 그 여자가 결국 자신을 구해준 셈이었다.

"세상 참 이상하지?"


진호에게서 마지막으로 온 문자메시지가 있었다.

"정말 미안해. 하지만 너를 진짜 사랑했어. 돈은 꼭 갚을게."

그 메시지를 본 순간 수진의 분노가 폭발했다. 버러지 같은 놈이 나를 8개월 동안 완전히 농락한 것도 모자라, 아직도 나를 바보로 보고 있는 것이었다. '너를 진짜 사랑했어'라니. '돈은 꼭 갚을게'라니.

무엇으로? 어떻게? 백수가?

수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나 좀 도와줘."

수진은 아버지에게 모든 상황을 털어놓았다. 학력 사기, 직업 거짓말, 바람, 그리고 2천만원 사기까지.

"그래, 알았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평소 온화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렇게 차가운 건 처음이었다. 외동딸인 수진에게는 항상 자상했지만, 아버지가 이런 재력을 온화한 방법만으로 쌓았을 리는 없다는 걸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름이랑 전화번호 보내라. 뒷 일은 애비가 알아서 하마. 집에 한 번 오너라. 같이 밥 먹은지도 오래됐잖니?"

다음 날부터 진호에게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수진도 진호가 어떻게 되었는지 굳이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 무렵, 어두운 공해상 위에 작은 어선 한 척이 조용히 떠 있었다. 달빛도 구름에 가려져 있는 캄캄한 밤이었다.

'첨벙—'

무거워 보이는 드럼통 하나가 바다로 떨어지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곧이어 물거품들이 몇 개 올라왔다가 사라졌고, 다시 고요함만이 남았다.

어선은 천천히 뱃머리를 돌려 항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 수진은 오랜만에 본가에 갔다. 아버지와 저녁 식사를 막 마쳤을 때 어머니가 늦게 퇴근해서 들어왔다.

"미안미안. 오랜만에 딸래미 왔는데 내가 좀 늦었네. 병원에 일이 좀 있었어."

어머니는 피곤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수술비가 모자라서 수술을 미루던 환자가 있었는데 아들이 수술비를 마련해와서 수술을 잘 마쳤거든. 뇌종양이었는데 양성이지만 계속 커지고 있어서 빨리 제거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 어쨋든 이제 회복해서 퇴원해야 되는데 보호자인 아들이 거의 일주일째 나타나지 않아서 환자가 퇴원을 못하고 있네 연락도 안되고... 휴..."

수진과 아버지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병원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연락이 안 된다고? 휴대폰 꺼져 있나?"

"응, 계속 꺼져 있어. 주소도 거짓으로 적어놔서... 참 이상한 일이야."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안타까워했다. 어머니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자 아버지가 수진에게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아무일도 없었다고 생각해라. 아빠가 다 정리했다."

수진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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