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관심

또 다시, 어김없이

by 방덕붕

*** 이 소설에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명, 인물, 스크립트, 음성, 회사, 단체, 지명, 국명, 사건, 제품, 그리고 모든 고유명사는 전부 실제와는 일절 관계가 없이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충동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기억마저 흐리게 만든다.


지금 민호에게는 정연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이 순간이 전부였다. 온 세상이 흑백이 되고 그 사람만 선명한 컬러로 빛나는 그 순간. 분명 수진을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을 텐데, 민호는 그 기억조차 희미해져서 지금 이 떨림이 생애 처음인 것처럼 느껴졌다.


"3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15% 상승했습니다."


정연의 목소리는 안정적이다. 손짓 하나하나도 자연스럽게, 고객들은 한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빠져들었다.


정연이 자료를 넘길 때마다 그의 손목에서는 시계가 은은하게 반짝였고 정연이 웃을 때 보이는 치아도, 잠시 머리를 넘길 때의 청순함도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처음엔 동경이었다.


민호는 신입사원 교육 일환으로 처음 팀 회의를 참관하게 되었다.


"이번 주 일정 점검해볼게요. 김과장님, 기획안 진행 상황은?"

"아, 그게... 클라이언트 쪽에서 갑자기 요구사항을 바꿔서 좀 지연되고 있어요."

"어떤 부분이요?"

"UI를 많은 부분 수정해달라고..."


정연이 화이트보드에 일정표를 그리며 말했다.


"그럼 디자인팀이랑 회의 먼저 잡고, 수정된 기획안 나오면 개발팀에 바로 넘기는 걸로 하죠. 박대리님, 개발 일정 얼마나 여유 있어요?"

"많이 드려도 이틀 이상은 안돼요."

"좋아요. 그럼 오늘 오후에 디자인팀 미팅 잡을게요."


이때 마케팅팀에서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그럼 우리 런칭 일정도 밀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요. 지금 상황에서 런칭 일정을 미루는 것도 성급할 것 같아요. 베타 테스트도 있으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다들 아시는 내용이니까... 마케팅 준비는 계속 진행하시고, 런칭 일정은 그대로 가죠. 베타 테스트 기간을 하루 줄이던가 하죠."

"그래도 괜찮겠어요?"

"OUTPUT만 문제 없이 나오면 괜찮지 않겠어요?" 정연이 웃으며 모두와 눈을 맞추었다.

"다들 괜찮죠?"


회의실이 조용해졌다가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무의식에서 이 프로젝트가 잘 되든 못 되든 정연에게 떠넘겨야겠다는 이기심이 발동되었다.


민호의 정연에 대한 동경이 한층 더 깊어졌다.


점심시간, 정연이 동료들과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시며 웃고 있었다. 정장 재킷을 벗고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린 채, 자연스럽게 농담을 던지는 모습. 남자 동료들이 그녀 주변에 모여 앉아 이야기에 빠져드는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며, 민호는 '아... 저 사람이랑 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은 정연이 새벽 일찍 출근해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점검하는 모습을 봤다. 완벽하게 차려입은 검은색 정장, 책상 위에 정리된 서류들, 집중해서 타이핑하는 손끝까지. 그 모든 것이 민호에게는 이루고 싶은 목표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동경은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정연이 복도에서 다른 동료들과 농담을 나누며 웃는 모습, 커피를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보는 모습까지도 민호는 놓치지 않았다.


입사 한 달 뒤, 팀 회식이 있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간 뒤, 동료들이 각자 고민을 털어놓고 있었다.


"요즘 타 부서랑 협업이 너무 어려워서... 일정은 촉박한데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니까..."


김대리가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중에, 민호는 갑자기 옆에 앉은 정연에게만 조용히 말했다.


"저 사실 ADHD가 있어요. 집중 잘 안 되고 그래서... 일할 때 실수도 많이 하고."


"약은 먹고 있어요. 약을 먹으면 집중력도 좋아지고 머리도 맑아지고 해서 일하는데 문제는 없어요." 라고 말하며 민호는 얼굴이 붉어졌지만 이미 몇 잔 들어간 술기운에 얼굴이 달아올라 있어 그 부끄러움이 표가 나지는 않았다.


옆에 있던 동료가 얼굴을 김대리 쪽으로 한 상태로 민호의 팔을 팔꿈치로 툭 쳤다. 아마도 '지금 대리님이 말씀하고 계시는데'라고 눈치를 주는 것이리라. 정연은 민호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아, 그래? 괜찮아. 나도 가끔 그런 편이야."


정연은 민호의 눈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민호는 차마 정연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정연은 민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회의 중에도, 복도에서 마주칠 때도, 민호의 눈이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는 걸 알고 있었다.


며칠 뒤, 정연이 민호의 자리로 다가왔다.


"민호야, 이 자료 정리 좀 도와줄 수 있어?"


민호는 순간 얼어붙었다. 정연 선배가 직접 자신에게 일을 부탁하다니. 주변 동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네, 물론이죠!"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민호는 최대한 침착하게 대답했다.


"고마워. 퇴근 시간에 잠깐 도와줄 수 있어?"

"네!"


그날 오후 6시, 사무실에는 민호와 정연만 남았다. 민호는 긴장해서 손에 땀이 났다.


"역시 민호가 제일 믿음직해."


정연이 민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순간 민호는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지난번 회식 때 얘기...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 안 했으니까 걱정 마."

"감사해요."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비밀이야."


정연이 윙크했다. 민호는 하루 종일 그 윙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늘도 늦네? 요즘 야근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수진이 전화로 불만을 표했다.


"미안해. 정연 선배가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정연 선배, 정연 선배... 요즘 그 사람 얘기만 하네."


수진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있었다.


"그런 게 아니야. 회사일이니까 어쩔 수 없잖아."


민호가 변명했지만, 스스로도 거짓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정말 이상해졌어. 예전엔 내가 힘들다고 하면 달려왔는데."

"..."


민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민호야, 주말에 시간 있어? 회사 행사 준비 좀 도와줄 수 있어?"

"네, 있어요. 무슨 일이세요?"

"다른 애들은 다 약속이 있다고 하더라. 날 도와줄 사람이 너밖에 없어..."


정연이 조금 슬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민호는 수진과의 약속이 있었지만 고민하지 않았다.


"도와드릴게요."


그날 밤 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해, 내일 약속 취소해야 할 것 같아."

"또? 이번이 벌써 세 번째야!"

"정말 미안해. 중요한 일이라서..."

"너 진짜 이상해졌어. 그 선배 때문이지?"

"무슨 소리야. 그냥 일이라고."

"일? 주말에 무슨 일이야? 그 선배가 너 부려먹는 거 아니야?"


민호는 수진이 정연 선배를 나쁘게 말하는 게 싫었다.


"하지마?! 내가 그러다가 회사에서 찍히면 좋겠어? 신입이 선배 부탁 거절하면 어떻게 돼? 너도 회사 생활 해봐서 알 것 아니야?"

"뭐?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거야?"

"아... 아니야... 미안..."

"그런 말 하지 마."

"너 그 선배 좋아하는 거 맞지?"


민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맞네."


수진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다음 날, 정연과 단둘이 회사에서 행사 준비를 했다.


"여자친구가 화났을 것 같은데 괜찮아?"


정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별로 안 괜찮아요... 요즘 자주 싸워서."

"왜? 뭐가 문제인데?"

"제가 일하는 걸 이해 못 한다고... 맨날 선배님 얘기만 한다고 그래요."

"그런 여자친구는 별로인데? 진짜 사랑한다면 네 일을 이해해야지."


정연이 진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맞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민호는 정말 성실하고 좋은 사람인데... 수진이가 너를 몰라주는 것 같아."


정연의 말에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민호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팀 회식 자리에서 정연은 의도적으로 민호를 부각시켰다.


"민호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정말 수고 많이 했어요. 주말에도 나와서 도와주고."


다른 동료들이 민호를 바라봤다.


"주말에도 나왔어요?"

"네... 선배님이 부탁하셔서..."

"민호는 정말 열심히 해. 요즘 신입들 중에 이런 애 드물어."


정연의 칭찬에 민호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한 동료가 속삭였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 왜 민호만 맨날 시키지?"

"쉿, 들려."


그로부터 한 달 뒤, 수진이 결정적인 말을 했다.


"우리 헤어져."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야. 너 요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어."


수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정연 선배 때문이잖아. 솔직히 말해봐, 너 그 사람 좋아하지?"


민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답 나왔네."


수진이 가방을 들었다.


"3년이나 사귀었는데... 이렇게 끝나는구나."

"수진아..."

"잘 살아. 그 선배랑 행복하게."


문이 닫혔다. 민호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음 날 회사에서 민호는 멍한 상태였다.


"무슨 일 있어? 안색이 안 좋은데."


정연이 다가와 물었다. 민호는 정연의 목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편해졌다.


"수진이랑... 헤어졌어요."

"어머, 정말? 괜찮아?"


정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요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속상하겠다. 오늘 저녁에 술 한잔 할래? 내가 위로해줄게."

"정말요?"


민호의 얼굴이 처음으로 밝아졌다.

그날 밤 정연과 둘이서 소주를 마시며, 민호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놨다.


"사실... 선배가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수진이랑 자꾸 싸우게 됐나봐요."

"나도 민호 많이 예뻐해. 너만큼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


정연이 민호의 손을 잡았다. 민호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정말요?"

"정말이야. 민호는 특별해."


그 뒤로 민호는 완전히 정연에게 빠져들었다.


"민호야, 내 차 세차 좀 해줄 수 있어? 시간 날 때."

"네!"


"민호야, 우리 어머니 병원 모시고 갈 수 있어? 운전이 무서우시대."

"물론이죠!"


"민호야, 내 집 청소 좀... 친구들 오는데 시간이 없어서."

"바로 갈게요!"


정연의 부탁은 점점 개인적인 것들로 바뀌었지만, 민호는 거절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민호 저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정연 선배도 좀 그런 것 같은데... 너무 부려먹는 거 아냐?"


그런데 3개월이 지나자 정연의 태도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민호야, 이 일 왜 이렇게 했어?"

"죄송해요. 어디가 잘못됐나요?"

"여기 보면... 이건 이렇게 하는 게 아니잖아."


정연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있었다.


"다시 할게요."

"요즘 집중이 잘 안돼? ADHD 약은 잘 먹고 있어?"


민호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실수했어요."

"실수가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좀 더 신경 써. 나도 바쁜데 이런 걸로 시간 뺏기면 곤란해."


민호는 혼란스러웠다.


일주일 뒤, 민호는 복도에서 정연이 다른 동료와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다.


"민호요? 아, 그 친구... 요즘 좀 이상해요."

"어떻게요?"

"저한테 너무 의존하는 것 같아요. 개인적인 일까지 다 도와달라고 하고... 경계가 없어요."

"어머, 그래요?"

"ADHD가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런가봐요. 사회성이 좀 떨어지는 것 같아요."

"힘들겠네요."

"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거절하면 상처받을까봐 그동안 참았는데."


민호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정연은 민호를 노골적으로 피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용기를 내어 물었지만, 정연은 차갑게 대답했다.


"잘못한 것보다는... 좀 거리를 둬야 할 것 같아요."

"왜요? 무슨 일이..."

"동료들이 이상하게 보더라고요. 민호씨가 저한테 너무 집착한다고."

"집착이요? 선배가 부탁하셔서 도와드린 건데..."

"민호씨, 내가 언제 집 청소까지 부탁했어? 차 세차도 그렇고... 민호씨가 하겠다고 해서 그냥 받아준 건데."


민호는 할 말을 잃었다. 분명 정연이 부탁한 것들이었는데...


"민호씨가 너무 오해한 거야. 나는 선배로서 친절하게 해준 건데."

"그럼... 그럼 제가..."

"미안하지만 이제 개인적인 연락은 안 하는 게 좋겠어. 오해받을 수 있으니까."


민호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민호의 진짜 지옥이 시작됐다.


동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복도에서 만나면 피해가고, 점심 때도 자연스럽게 제외됐다. 때때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근거리는 게 들리기도 했다.


"쟤야? 정연 선배 스토킹 하는 애가?"

"정연 선배도 참… 사람이 너무 좋다니까…"

"ADHD라며? 아니 그런 건 입사 전에 회사에 알렸나?"


민호는 항변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회의 때도 마찬가지였다.


"민호씨 의견은 어때요?"

"아... 저는..."

"아... 정리해서 말하기 힘들면 다른 분 의견 들어볼게요."


아무도 민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혼자 구석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다른 동료들이 모여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바라봤다. 가끔 자신을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것도 보였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가 결정적으로 민호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민호 그 친구, 정말 심각한 것 같아."

"맞아. ADHD라더니 정말 문제가 있는 거 아냐?"

"정연 선배도 참 고생이야. 착하니까 거절 못 하고..."

"근데 왜 아직도 안 짤렸지? 일도 못 하는데."


민호는 차마 밖으로 나갈 자신이 없어 한참을 변기 위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민호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마지막 날, 민호는 자신의 물건들을 박스에 정리하고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희망으로 가득했던 책상이 이제는 쓸쓸해 보였다.


"민호씨, 그만둔다면서요?"


정연이 다가왔다. 민호는 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

"아쉽네요."


정연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에는 따뜻함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승리자의 여유로운 미소 같았다.

민호는 정연을 바라봤다. 몇 달 전까지 자신이 그토록 동경했던 사람. 자신을 이해해준다고 믿었던 사람. 하지만 지금 그 앞에 서 있는 건 완전히 낯선 사람이었다.


"왜요? 왜 갑자기 이렇게 바뀐 거예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민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요. 그냥...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서."


정연의 목소리는 차갑고 무미건조했다.


"오해요? 무슨 오해요?"


"민호씨는 저를 다른 의미로 생각한 것 같은데, 저는 그냥 선배로서 친절하게 해준 것뿐이에요."


정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ADHD 때문에 상황 파악이 좀 어려우신 것 같네요. 그것도 한번 상담받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 순간 민호는 깨달았다.

민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박스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민호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호는 박스를 들고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동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민호는 처음으로 눈물이 나려는 걸 느꼈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


정연은 민호가 떠난 뒤 동료들에게 말했다.


"그래도 불쌍하긴 해요. ADHD 때문에 사회성이 부족한 것 같아서."

"정연씨가 너무 착해서 문제예요. 그런 사람한테 친절하게 해주니까 착각하죠."

"다음엔 조심해야겠어요."


정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집으로 돌아온 민호는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여자친구도, 직장도, 자존감도 모든 걸 잃었다. 하지만 가장 아픈 건 자신이 그토록 믿었던 사람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민호는 초등학교 때 짝꿍에게 매일 과자를 사줬다가 "귀찮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중학교 때 좋아하는 친구 숙제를 대신 해주다가 "너 때문에 피곤해"라며 외면당했던 일도. 그때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만 생각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또 다시.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민호는 그 자리에 앉아서 어둠이 찾아오는 걸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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