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금, 당신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이것은 어쩌면 무한히 반복되는 타임루프일지도 모른다.
도명은 강남 펜트하우스 복도에 서서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손이 떨렸다. 몇 번째인가? 벌써 여러 번 이 문 앞에 섰다. 항상 같은 시간, 오후 3시 47분.
문은 열려있었다. 항상 그랬다.
"들어오세요."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도명은 들어갔다. 70대의 박회장이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검은색 서류 가방이 놓여있었다. 그 안에 3억원이 들어있다는 걸 도명은 알고 있었다.
"앉으세요." 박회장이 말했다.
도명은 앉지 않았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서류 가방을 들려고 하면 손이 닿지 않을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막는 것처럼.
"저 가방..." 도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거요?" 박회장이 가방을 바라봤다. "가져가고 싶으세요?"
"네."
"가져가세요."
도명은 망설였다. 지난번들과 똑같은 대화였다. 하지만 매번 가방을 들 수 없었다. 마치 몇 톤이나 나가는 것처럼.
그래도 다시 시도했다. 손을 뻗었다.
가방이 움직이지 않았다.
"왜... 왜 안 들려요?" 도명이 절망적으로 물었다.
박회장이 일어나서 도명에게 다가왔다.
"정말 그 가방이 필요한가요?"
"네. 엄마 수술비가..."
"그게 답이 아니에요." 박회장이 조용히 말했다. "진짜 답은 다른 곳에 있어요."
"뭔 소리예요? 돈이 필요하다고요!"
박회장이 도명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불사선불사악."
"뭐라고요?"
"선하다 악하다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본래 면목은 무엇입니까?"
도명은 그 말에 멈춰섰다. 루프를 반복하면서 계속 들었던 질문이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제가... 제가 누구라는 거예요?"
"그걸 묻고 있는 거예요."
도명은 가방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봤다.
"저는..." 도명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도둑이려고 했어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요."
"그게 악한 일인가요?"
도명은 당황했다. "당연히... 아니, 잠깐만요."
그는 혼란스러워했다. "남의 돈을 훔치는 건 나쁜 일이잖아요. 하지만 어머니를 살리는 건 좋은 일이고... 그럼 이건 선한 일인가요? 악한 일인가요?"
"좋은 질문이에요."
"정말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죽어가는데 가만히 있으면 그게 착한 건가요? 아니면 남의 돈을 훔쳐서라도 살려야 하는 건가요?"
박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지점이에요. 선과 악이 명확하지 않은 순간. 그런 순간에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럼 행동 이전의 당신은 누구죠?"
도명은 한참 생각했다. 루프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온갖 모습들을 봤다. 절망하는 자신, 화내는 자신, 포기하는 자신, 탐욕스러운 자신...
"잘 모르겠어요." 도명이 절망적으로 말했다. "세상이 흑백으로 나뉘어져 있다면 쉬웠을 텐데... 제가 하려던 일이 선인지 악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 모르겠다는 마음, 그 혼란 자체가 중요해요."
"왜요?"
"확신할 때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모를 때 보이거든요."
"선하다 악하다는 생각을 모두 놓으세요.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도, 도둑질에 대한 죄책감도, 모든 판단을 내려놓으세요. 그럼 뭐가 남나요?"
도명은 눈을 감았다. 선악의 판단을 모두 내려놓았다. 자신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이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모든 판단을 멈췄다.
그랬더니 이상한 고요함이 찾아왔다.
"고요해요." 도명이 속삭였다.
"고요함이요?"
"어머니에 대한 사랑도, 죄책감도, 선악에 대한 고민도 모두 내려놓았을 때 남는 것. 그게 당신의 본래 면목이에요."
"그럼... 제가 어머니를 위해 이런 일을 하려 한 건 잘못된 건가요?"
"잘못되었다 옳다를 떠나서, 그 마음 이전에 당신이 있었어요. 조건 없는 당신이."
도명은 눈을 떴다. 박회장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악을 판단하기 이전의 당신. 조건이나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당신의 본질."
"그럼... 제가 지금까지 한 고민들은 뭐였어요?"
"필요한 과정이었어요. 하지만 답은 고민 속에 있지 않았어요. 고민을 멈췄을 때 나타났죠."
도명은 다시 가방을 바라봤다. 이상하게 이제는 가방이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가방을 가져가고 싶지 않아요."
"왜요?"
"필요 없을 것 같아서요."
박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져갈 수 있을 거예요."
"네?"
"해보세요."
도명은 망설이다가 손을 뻗었다. 이번엔 가방이 쉽게 들려졌다. 깃털처럼 가벼웠다.
"왜 이제는 들려요?"
"탐욕으로 잡으려 할 때는 안 들렸어요. 욕망을 놓았을 때 들렸죠."
도명은 가방을 다시 탁자에 놓았다.
"가져가지 않을게요."
"왜요?"
"제 것이 아니니까요."
박회장이 활짝 웃었다.
"축하합니다. 깨달으셨네요."
갑자기 세상이 환해졌다. 도명은 자신이 병원 로비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에는 의료비 지원 신청서가 들려있었다.
언제 여기 왔을까?
간호사가 다가왔다.
"도명씨, 심사 결과 나왔어요. 의료비 지원 승인됐습니다."
그날 밤, 도명은 어머니 병실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
"엄마, 오늘 이상한 일이 있었어."
"무슨 일?"
"내가 누군지 알 것 같아."
어머니가 웃었다.
"뚱딴지 같은 소릴해...그래? 그럼 넌 누구야?"
도명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냥... 도명이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그냥 도명."
"하하하 그래 그렇네."
"네, 그냥 그걸로 충분해요."
창밖으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않아도 됐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이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