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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 Jul 13. 2020

해 질 녘에 진가를 발휘하는 바다

퀴라소

 지난 글에서 소개한 아루바에 이어 ABC제도 중 C를 담당하고 있는 퀴라소 역시 네덜란드령의 섬이다. 아루바 바로 옆에 붙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규모도 더 작고 훨씬 한가하다.

 아루바가 캐리비안의 미국 같은 느낌이라면 퀴라소는 캐리비안의 네덜란드 같다. 퀴라소 방문객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가 네덜란드이다. 카리브해를 끼고 있는 건물들의 모습이 운하를 따라 자리잡은 네덜란드의 건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청색과 백색이 어우러진 도자기와 튤립, 풍차, 미피 캐릭터의 기념품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퀴라소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포털사이트 실검 1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나 역시 핸드폰을 보다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놀랐었는데 알고 보니 2019 킹스컵 결승전에서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의 상대가 퀴라소였던 것이다. 당시 우승은 퀴라소가 차지했다. 한편 칵테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법한 블루 큐라소의 큐라소가 바로 퀴라소이다. 이 정도면 막연하게 낯선 곳도 아닌 것 같다.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2시간 정도의 비행이면 퀴라소의 수도, 빌렘스타트에 도착한다. 공항은 한산하지만 생각보다 작지 않고 깨끗했다. 퀴라소도 아루바처럼 버스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대중교통으로 돌아다닐만하다. 빌렘스타트 중심지인 오트로반다와 푼다에 버스터미널이 있어 섬의 남쪽으로 돌아다닐 땐 푼다, 북쪽으로 갈 땐  오트로반다 터미널로 가면 된다.


 라소는 휴양지이지만 해변뿐만 아니라 시내 구경 놓치기 아까운 곳이다.

 빌렘스타트의 중심에는 카리브해를 가로지르는 퀸 엠마 브릿지가 있다. 물 위에 떠있는 부교인데 배가 지나갈 때면 다리가 스윽 열려서 길을 터준다. 이때 보행자들은 다리를 못 건너기 때문에 무료로 운행되는 페리를 타야 한다. 큰 배가 지나가면 다리 전체가 개방되다보니 시간이 걸려 페리를 타야 하지만 작은 배가 지나가면 조금 열렸다 닫혀서 기다릴만하다.

 이 곳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퀸 엠마 브릿지 주변에 자리 잡은 다채로운 색깔의 건물들이다. 새파란 바다와 푸른 하늘 사이에 자리 잡은 알록달록 원색 건물들의 모습이 동화 속 나라 같다. 한편 밤이 되면 다리 역시 알록달록 건물들처럼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의 조명으로 연출되는데 바다가 칠흑같이 어두워서 그런지 더 밝게 빛난다.

퀸 엠마 브릿지의 낮과 밤

 


 다운타운은 퀸 엠마 브릿지가 있는 St. Anna Bay를 가운데 두고 서쪽은 오트로반다(Otrobanda), 동쪽은 푼다(Punda) 지역으로 나뉜다.  

 알록달록한 예쁜 집들이 모여있는 푼다의 구석구석을 산책하다 보면 소소한 볼거리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다. 퀴라소에서 가장 많이 보였던 단어, Dushi는 조형물로도 길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현지인들은 네덜란드어 외에도 파피아멘토라는 이 곳 언어를 사용하는데 Dushi는 sweet, nice, tasty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골목의 벽화도 인상적이다. 로컬 아티스트 Nena Sanchez 작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퀴라소의 아름다운 자연에 영감을 받은 작가의 밝고 과감한 터치가 인상적이다. 

푼다의 street art



 오트로반다에는 크루즈 터미널이 있다. 크루즈 기항지라 그런지 배의 도착 여부에 따라 수많은 관광객들이 유입되어 도시 혼잡도가 달라진다. 터미널 쪽에는 19세기 초에 지어진 요새, Rif Fort가 접해있는데 현재는 상점과 레스토랑이 몰려있는 쇼핑몰로 사용되고 있다. 이 요새 성벽 위로 올라가면 시원한 바다와 동화 같은 빌렘스타트 시내가 어우러진 모습이 한눈에 펼쳐진다.

오트로반다의 Rif Fort에서 내려다본 빌렘스타트 시내



 퀴라소에는 천혜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해변이 많다. 섬의 북쪽 거의 끝에 위치한 클라인 크닙(Klein Knip)은 시내에서 버스로 약 한 시간 걸릴 정도로 거리가 꽤 되지만 가는 도중 섬 곳곳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산도 있고 황량한 수풀이 나오다 갑자기 예쁜 교회도 보이고 선인장에 플라멩코 서식지까지......

 한편 버스에 오르내리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소년의 어머니는 아들이 또 무슨 사고를 쳤는지 버스 안에서도 매섭게 혼내는데 소년은 한두 번 혼나 본 게 아닌지 무서워하지도 않고 웃으면서 손찌검을 맞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카리스마 넘치는 어머니는 나에게 어찌나 자상하시던지 내가 내릴 정류소도 확인해 주시고 흔들리는 차 안에서 내가 넘어질까 붙잡아주시고는 해서 잠시 혼란스러웠던 에피소드도 있다.  

 클라인 크닙은 레스토랑이나 리조트 시설이 몰려있는 곳이 아닌, 편의시설이라고는 파라솔 밖에 없는 작지만 숨은 보석 같은 해변이다. 시내에서 거리가 멀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만큼 찾아온 사람들도 별로 없어 한가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물도 차갑고 파도도 세다. 투명한 물속에서 각양각색의 열대어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늘과 물과 모래만이 존재하는 자연 그대로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클라인 크닙 해변



 한편 시내에서 보다 더 가까운 해변으로는 푼다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얀 티엘 (Jan Thiel) 비치가 있다. 작은 규모에 비해 주변에 편의시설이 많고 비치 체어가 빽빽하게 배열되어 있다. 사실 첫인상은 그냥 평범한 해변가인데 이 곳의 진정한 가치는 따로 있다. 강렬한 태양을 피해 오후 늦게 도착해 비치 의자에 앉아 있다 보니 해질 시간이 다되어 갔다. 그런데 하늘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해 노을이 지는구나 하며 바라보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빨강 주황 보라색이 회오리를 이루며 하늘을 휘몰아쳤다. 이런 석양은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붉은빛의 향연이었다.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에 떨어진 것 같이 비현실적이어서 내 눈이 이상한가 의심했을 정도로 신기하고도 감동적이었다.

얀 티엘 비치의 석양


 

 다운타운부터 해변까지, 낮부터 밤까지 빼놓을 것 없이 매력 있는 곳이 바로 여기, 퀴라소였다. 한 때는 이름도 몰랐던 낯선 곳인데 수 일에 걸친 여정 끝에 도착해 처음 보는 광경에 신기해하고 당황하기도 하고 감동도 받았던 그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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