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박템은 꽃무늬 주름바지
지금도 친정아빠는 엄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옷들을 책임지신다. 홈쇼핑으로. 주로 쇼핑 집중 시간은 심야 시간으로 초저녁부터 잠드시다가 밤시간에 깨서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엄마의 물건을 리모컨으로 사곤 하신다. 주로 심야 시간대 중년 부인들을 겨냥한 홈쇼핑방송이 주요 쇼핑창구인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친정에 가면 엄마는 그간 아빠의 작품이라며 택도 뜯지 않은 옷들을 안방에 주욱 꺼내놓고 가져가라고 하신다. 전부 가져가면 아빠가 서운해하니 아빠 모르게 가져가라며 귀띔하시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엄마, 마음에 안 들면 반품을 하셔. 이거 자원낭비아녀?"
"너네 아빠 알면 서운해해. 가격도 싸고 아니면 말지 뭐."
"아빠도 참, 엄마 옷 스스로 사게 놔두지 이렇게 꼭 손수 골라주고 싶을까."
엄마는 아빠가 고른 옷들을 대부분 싫어한다. 예의상 아빠 앞에서 한두 번 입어주고 아빠 몰래 주변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있다. 엄마의 옷장에는 그해 유행하는 패딩, 바지, 시스루 블라우스, 운동복, 반바지 옷장사 해도 될 만큼 옷들이 쌓여있다. 아빠의 쇼핑 목록은 겉옷만이 아니다. 중년부인들을 위한 배위까지 모두 감싸고도 남을 맥시라인 팬티부터 우리 엄마 발 시릴까 봐 꽃버선까지 품목도 버라이어티 하다.
"엄마, 이 옷 저번에 가져간 건데?"
"네 아빠가 또 샀어. 취향 한결같지? 샀던 게 또 이뻐 보이나 봐."
"아 웃겨, 산거 또 산거 대박."
이렇게 친정에 갈 때마다 엄마와 함께 아빠의 한결같은 취향을 확인하며 옷을 나눈다. 대부분 엄마한테 가져온 옷들은 집안에서 아주 편안하게 입을 수 있어서 좋다. 88,99 사이즈의 큰 옷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시중에서 사고 싶어도 사이즈가 없어 사기도 힘들다. 아빠는 가끔 엄마한테 사준 옷이 사이즈가 너무 작거나 디자인이 중년 여성에게 너무 영한 느낌이면 꼭 나한테 입어보라고 한다. 선심 쓰듯이 나한테 버리는데 어이가 없다. 하지만 나도 살이 쪄서 이제 고무줄 아니면 옷을 입기가 힘들어 어느 순간 엄마가 언제 옷을 나에게 버리려나 기대하고 있다.
아빠의 쇼핑은 엄마에 대한 사랑표현이다. 그걸 알아서 엄마도 그냥 맞춰준다. 싫다고 몇 번 해봤지만 반품도 귀찮고 가격도 저렴해서 그냥 받고 고맙다 해버린다. 아마 엄마가 무척이나 주장이 강하고 셌다면 아빠랑 수도 없이 부딪혔을 것이다. 호랑이 같은 아빠의 성향을 엄마가 큰아들이다 생각하고 받아주는 것이다. 세상 무서운게 없을것 같은 호랑이 같던 아빠도 나이가 들어 집에 계시다 보니 그렇게 쇼핑을 하고 집안을 쓸고 닦으신다. 쇼핑한 것 엄마가 입나 안입나 물어보고 잘 맞으면 좋아하며 그러고 사신다. 엄마는 어이없지만 그냥 아빠가 다른 곳에 헛돈 쓰는 것보다 낫다고 하며 아빠의 사랑가득 쇼핑장단에 맞춰주신다.
가끔 아빠의 쇼핑은 대박칠 때가 있다. 더운 여름에 반바지를 입고 있자니 의자에 앉을 때 살이 달라붙고 긴바지를 입자니 덥고 면을 입자니 통풍이 안 돼서 더운 느낌인데 올해 쇼핑한 꽃무늬 주름바지는 모든 것을 커버해 준다. 엄마가 입어보고 이건 괜찮다며 나한테 가져가라고 싸주셨다. 웬걸 너무 좋아서 나도 집에 있던 오래된 여름 바지 다 버리고 꽃무늬 주름바지만 입고 또 입고 있다. 건조도 빨라서 세탁 후 바로 건조기에 넣으면 하루도 빠짐없이 입을 수 있다. 마치 내 살처럼 편안한 느낌! 그동안 인견바지가 최고인 줄 알고 살았는데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처음에는 엄마가 아빠의 홈쇼핑 옷들을 나에게만 버렸는데 이제 라이벌이 생겼다. 내 동생이 살이 찌면서 엄마의 옷들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홈쇼핑의 트렌드에 뒤쳐질세라 패션에 매우 민감한 아빠가 계속해서 옷을 공급해줘서 우리 둘이 사이좋게 나눠 입고 있다. 내 동생이 결혼하고 나와 체격이 비슷한 제부가 들어오자 라이벌이 +1 되었다. 놀라울 정도로 이물감 없이 우리 가족에 흡수된 제부가 엄마의 옷들을 탐내기 시작했다. 엄마가 옷들을 꺼내놓으면 안방에 셋이 같이 옷을 고른다. 홈쇼핑에서 티를 사면 흰색 2개, 검정, 회색 이런 구성이라면 나는 주로 흰색, 동생은 검정, 제부는 회색 이렇게 나눠갖는다. 어릴때나 마흔이 훌쩍 넘은 지금이나 아빠가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입히고 있다. 역시 우리 아빠가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