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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스런 후후작가 Aug 06. 2024

드디어 품에 안은 스발로브스키

어머님 아들 말고 내 아들 잘 가르치기

  어릴 적 떠오르는 아빠의 퇴근길의 기억은 봉지소리였다. 부스럭부스럭 짤랑짤랑 아빠가 돌아오실 즈음 동생과 나는 현관에서 귀를 기울이며 오늘은 뭘까? 상상하며 강아지가 주인을 기다리듯 문 앞에서 기다렸다. 왜냐하면 아빠는 빈손으로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이다. 하다 못해 본인 드실 소주라도 항상 사 오셨다.


한번은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시는 아빠가 봉투 안에 강아지를 담아 오신 적도 있었다. 결국 엄마의 불호령으로 그 강아지는 봉투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다시 집밖으로 쫓겨났다. 그 후로는 더더욱 봉지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 우리는 내용물이 항상 궁금했다. 아빠한테 미안하지만 아빠보다 아빠의 봉지가 더 궁금했던 게 사실이다. 월급날 즈음이면 얼큰하게 취하신 아빠가 제법 큰 봉지를 들고 오셨다. 봉지안에 들어있는 종이봉투안에는 장닭을 튀겼는지 양이 어마무시하게 많은 통닭이 담겨있었다. 닭튀김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아빠의 검은색 봉지 안에 배달되어 오는 날은 생일날처럼 기뻤다. 아빠의 퇴근시간이 되면 동생과 통닭이 맞다 아니다 추측게임을 하며 현관에서 촌각을 곤두세워가며 기다렸던 즐거웠던 추억이 떠오른다.


아빠의 퇴근길 봉지 통닭을 먹고 자란 내가 결혼을 했다. 어쩜 이 남자는 뭘 사 오는 법이 없다. 허구헌날 빈손이다. 오랜 세월 봉지소리의 즐거움을 알고 자란 나에게 이분은 문화가 이질적인 외국인처럼 색다르게 느껴졌다. 신혼 초에는 교육의 일환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여보, 오늘 모 먹었어?"

"1차는 삼겹살집 가고 2차는 맥줏집 간 것 같은데 왜?"

"신나게 놀았네? 집에 들어올 때 아무거나 맛있는 것 좀 사 와봐. 꼭 먹어야 맛이 아니라 자긴 한 번을 안 사 오네?"

"뭘 사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밤이라 늦어서 아무것도 없을 텐데"

"미금역에 풀빵 맛있던데 그거라도 사와. 그건 늦게까지 하잖아"

이 남자는 그 해 겨울 내내 3천 원짜리 풀빵을 회식할 때마다 사 왔다. 어떤 날은 떨이라며 두 봉지 득템했다고 얼큰하게 취해서 내민 적도 있다. 내가 풀빵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붙었니? 풀빵옆에 땅콩빵도 있고 호떡도 있고 붕어빵도 있을 텐데... 센스가 0이 아니라 이 정도면 남편은 사실 기계가 아닌가 싶다. 이제 풀빵만 봐도 인상이 써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간이 아닌 거 같다고 철학적으로 쪼니까 자신은 정상이고 장인어른이 평균보다 다정해서 자기가 피해자란다. 와... AI 기계인 줄 알았는데 남 탓을 하는 걸 보니 사람은 맞는가 싶다.


그 후로도 자잘하게 고쳐보고자 몇 번 시도해봤다. 서프라이즈로 꽃선물 받고 싶다고 했더니 꽃가게 떨이했는지 정말 부담스럽게 사람 몸통만 한 꽃다발을 들고 들어온 적이 있다. 집에 있는 화병으로는 감당이 안돼서 쓰고 있던 물병을 임시로 꽃병으로 쓰고 나머지는 말렸다. 자기는 하라는 데로 했는데 왜 인상 쓰냐며 AI 기계가 화도 내며 앞으로 꽃선물 안 한다고 했다. 난 다시 한번 이런 식으로 꽃집 쓸어오면 죽여버린다고 했다. AI기계가 아니라 한 번을 나와 의견일치가 안되는 걸 보니 로또기계인 것 같지만 이미 샀으니 살살 달래서 쓰는 중이다.


외할아버지의 퇴근길 다정한 봉지의 피가 흐르는 내 아들은 다르게 키우고 싶었다. 아빠와 아들만 떠난 여행지에서 너네들만 신나게 놀지 말고 집에 있는 엄마에 대한 사랑 표현을 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내 거 모 샀어? 이탈리아에 아웃렛에 명품이 그렇게 싸다던데 안 갔지?"

"아웃렛 어디 있어? 한국에서도 안 가는데 이탈리에서 못 찾아. 여기 일정 빡세."

"자유여행인데 뭐가 빡세 마음의 문제지. 내 거 모라도 사와. 아들한테 그런 것도 가르치는 거야. 쫌."

잔소리했더니 자기 바쁘다면서 황급히 영상통화를 끊어버린다. 나쁜 기계 같으니.


부자가 돌아오는 날 가방검사를 하며 남편이 캐리어에서 쓰윽 분홍색 봉투를 내민다. 숙제 잘 해왔나 싶어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면 좀 다정하게 여보 선물이라며 주면 좋겠는데 꼭 저렇게 츤데레처럼 오다 주웠다는 식으로 준다.

"아들이 고른 거야. 면세점에서."

"오오 모야? 기대된다. 반짝거리는 거 좋아."

"이거 이름 모였지? 스발... 스발로브 뭐였는데. 백조모양 있고 아 맞다. 스발로브스키"

"너 나한테 지금 욕한 거니? ㅅㅂ 뭐, 시발놈에 새끼? 맞짱 뜰까?"

"왜? 사다 줘도 모라고 해 면세점에서 산거라니까."

"맞아. 엄마 그 팔찌 103유로야 젤 이뻐서 내가 고른 거야."

여행으로 부쩍 친해진 똑같이 생긴 전 씨들이 나를 괴롭힌다.

"얘들아 혹시 이거 스왈로브스키 맞니?"

"아 그 말이 맞는 거 같다. 왜 이리 말이 어려워."


이분은 부인 열받게 하는 과외를 어디서 받나 보다. 브랜드 이름을 제대로 알아오던지 아니면 그냥 백조무늬라고 말하던지 욕비슷하게 꼭 해야겠니? 일부러 엿 먹일라고 스발로브스키라고 한 것 아니라고 믿는다.


<스발로브스키 아니고 스왈로브스키 팔찌 착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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