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불감증
전동킥보드가 인기척 없이 내 옆을 빠른 속도로 지나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른 생각하다가 빠르게 질주하는 킥보드 쪽으로 머리라도 갖다 댔으면 그대로 해드샷 당해 날아갔을 것이다. 인도를 활주 하는 전동킥보드는 누구의 아이디어일까? 사람이 다니는 인도를 다닐 수 있게 허용 한 것 자체가 코미디다. 헬맷도 쓰고 운전면허증도 있어야 작동이 되던데 언뜻 보기에도 애띈 얼굴 아이들이 최고속도로 인도에서 라이딩을 즐긴다.
혼자도 아니고 두 명씩 킥보드에 올라 불법 스피드를 즐기며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저러다 사람 치면 크게 다칠 거라고 우려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 여고생 둘이 전동킥보드를 타고 가다 행인을 치어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전동킥보드를 허가한 인도에서는 킥보드를 타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행인들도 헬멧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매우 정정하셨던 증조할머니께서 과거에 초등학생의 자전거에 부딪혀서 뇌진탕으로 돌아가셨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함께 계셨던 할머니께서 기껏 애들 자전거에 치여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그 당시에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자전거에도 이렇게 무력한데 전동킥보드와 충돌은 교통사고와 다름없이 느껴질 것이다.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기술은 살상무기나 다름없이 느껴진다.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뱀은 가장 큰 위협이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빨리 알아보고 반응하도록 뇌가 진화했다. 뱀을 보면 아주 빠른 반응속도로 두려워하며 피하면서 부딪히면 즉사할 수도 있는 자동차를 볼 때는 뱀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르다. 자동차는 오히려 빠르고 크기가 크면 클수록 선호하기까지 한다. 실상 뱀에 물려 죽는 인간의 숫자보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비율이 훨씬 높을 텐데도 자동차보다 뱀을 무서워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인류의 역사상 유전자에 프로그래밍이 될 정도로 자동차의 역사가 길지 않기 때문에 아직 두려움이 인식조차 안된 것이다. 뱀을 앞지르려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동안은 생활 곳곳에 퍼져있는 위험한 요소들을 오늘도 요리조리 피하며 살아남기를 해야 한다.
과거 인도여행을 했을 때 릭샤와 인력거와 자동차가 뒤엉켜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는 길거리가 떠오른다. 거기에다 힌두교의 교리에 따라 소들을 신성시 여겨 길거리에 소들까지 활보하면 그야말로 혼돈이다. 신호도 횡단보도도 없는 그곳에서 반대편 쪽으로 길이라도 건널라치면 정말 죽음의 눈치게임에서 이겨야 가능하다. 무질서 안에서의 질서처럼 현지인들은 모세가 홍해를 가르듯 과감히 자동차를 가르며 길을 건너지만 외국인인 나는 한참을 눈치 보다 현지인이 건널 때 꼽사리 껴서 길을 건너곤 했다. 길을 건너고 나서 살아남아서 느꼈던 행복감을 한국에서도 느낄 줄이야. 이제는 싱글일 때처럼 죽음의 눈치게임하며 목숨을 내맡길 수는 없다.
얼마 전 매일같이 드나드는 길목에서 교통사고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우회전하는 버스가 횡단보도 신호를 무시하고 급하게 우회전하려다가 길을 건너는 70대 할머니를 치어 그 자리에서 사망하셨다. 그 길목을 드나들 때 바닥에 선명하게 칠해져 있는 하얀색 사람 모양 락카를 볼 때마다 섬뜩하다. 작은 체구의 웅크린 모습이 횡단보도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림으로 남아있었다. 그곳의 웅크린 모습이 나였을 수도 있다. 그 시간에 내가 그 길을 건너지 않아서 죽지 않은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은 차로 그 길을 우회전하며 아이를 영어학원에 데려다준다. 공원을 가려면 반드시 그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집 베란다에서도 보이는 매일같이 드나드는 길에서 누군가 교통사고 죽었다는 것이 적잖이 충격으로 와닿았다. 뉴스에서 떠드는 다중추돌 사고의 보도를 들을 때보다 몇 배의 공포로 다가왔다.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무기력함을 느낀다. 며칠 후에 그곳에 아주 커다란 플랜카드가 붙었다.
빨간불엔 일단 멈춤 후 우회전...
혹시 우회전 우선 멈춤을 몰라서 사고가 난 것인가?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아이에게 길 건널 때 신호만 볼 것이 아니라 좌우를 꼭 살피라고 신신당부했다. 하교 후에 아이와의 만남이 반가운 이유는 무사히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마워서 일지도 모른다. 운이 좋아서 살아있는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