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모드 OFF 작가모드 ON

by 최강정

"엄마 갔다 올게, 밥 다 먹고 싱크대에서 물 뿌려놔. 학원 지각하지 말고 미리 나가고...."

"네."

"지각하면 전화 오는 거 알지? 단어시험 제발 한 번만 통과해 봐. 그러면 엄마가..."

"엄마 언제 나가?"

"엄마 소원이야. 엄마 소원 정말 소박해. 1등도 아니고 영어학원 단어시험 통과야."

"소원이야?"

어라. 얘가 왜 이러지? 빨리 나가라고 등 떠밀어야 맞는데.

장화 신은 고양이 표정으로 눈빛 촉촉하게 한껏 기쁨에 찬 말투로

"그~~~ 으럼, 소원이지. 엄마가 소원 하나 들어줄게."

"생각해 볼게."

어미가 장화 신은 고양이 빙의해서 공부 좀 해달라는데 보그지 모델 저리 가짜로 시크한 말투로 생각해 보겠다고.

머리가 과열돼서 피꺼솟(피가 거꾸로 솟는다)되기 전에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다.

오늘도 당신 덕분에 도서관에 갑니다. 조금 더 붙어있으면 좋은 소리 안 나갈 거 같아서 스스로 너와 나의 격리를 선택한 것이다.


내가 가고 싶은 건지 너를 피해서 가는 건지 두개다인지 모르겠지만 도서관에 오면 순식간에 부캐로 빙의된다. 드라마에 팔자 사납다며 가슴 치며 신세한탄 하는 엄마 역할에 찌들어 있다가 순식간에 예비 작가모드로 변신할 수 있다. 리모컨 하나로 KBS 일일드라마 채널에서 딸깍 한번에 통통 튀는 EBS 진로채널로 돌려버린 것처럼 나는 이곳에서 더 이상 엄마가 아니다.


작가모드 ON

어디서든 캐릭터에 충실하자. 도서관에서의 나의 캐릭터는 작가모드이다. 일단 가방도 어깨쿠션 넓은 백팩을 을 매 줘야 한다. 작가님 하면 빠질 수 없는 노트북과 필기구, 빌려온 책 그리고 텀블러까지 넣어야 하니까.

연한 커피가 담겨있는 텀블러에 계속 소주를 담아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작가모드에서는 안될 소리다. 10분 거리에 제법 큰 시립도서관에 주차를 하고 재빨리 노트북 전용 열람실 좌석표를 출력했다.

383번.

아들 밥 챙겨주고 오후에 오면 좋은 창가 좌석은 이미 솔드아웃이다. 하지만 평일 오후면 학생들이 없어서 제법 잔여좌석이 많을법한데 오늘따라 남은 좌석도 몇 개 없다. 여중 여고 대학교도 여자 많은 교대. 남자옆보다 여자 옆이 편하다. 막상 자리 깔고 만나면 20년 지기 친구처럼 누구와도 잘 대화하지만 사실은 낯가림이 많은 편이다. 낯가림하는 작가. 왠지 캐릭터가 사는 기분이다.


좌석이 전부 남( ) 남, 아니면 남남( )만 남아있다. 선택권이 적으면 출입구에서 가까운 곳을 고르자. 답답하면 튀어 나갈 수 있게. 남( ) 남 383번 좌석표를 출력해서 4층으로 올라갔다.


요즘에 지어진 사방이 트여 개방감 넘치는 도서관에 비해 383번 열람실 나의 좌석은 나처럼 낯가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든 것처럼 칸막이가 설치돼있다. 칸막이 때문에 답답하지만 칸막이 덕분에 옆에 남자가 있어도 덜 신경 쓰인다. 마흔 넘은 아줌마가 뭘 자꾸 낯가린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줌마모드 아니고 작가모 드니까 부끄러워해도 된다.


안타깝게도 비워져있어야 할 나의 책상 위에는 커다란 백팩이, 의자에는 2배나 더 큰 백팩이 놓여있었다. 누군가 우리집 거실에 신발신고 들어온것 같은 껄끄러운 기분이 슬 올라온다. 양 옆의 남자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것들을 앞에 두고 동공이 흔들렸다. 내 인기척에 오른쪽 남자가 책상 위의 자신의 백팩을 황급히 갖고 갔다. 문제는 의자 위의 커다란 백팩이다. 왼쪽 남자, 그러니까 382는 자리에 온갖 물건들만 잡다한 채로 올려져 있고 사람은 없었다. 내가 선뜻 앉지 앉자 384번 오른쪽 남자가 왼쪽 남자의 가방까지 치워주었다. 입모양으로 '고맙습니다.'를 만들며 고개를 살짝 까닥이는 것으로 384의 빚은 탕감받았다.


모야? 정작 두 오른쪽 남자와 왼쪽 남자는 아무 생각 없을텐데 내 영역을 침범한 죄명을 부여하고 혼자 빚 탕감까지 해주는 나는 천상 작가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며 으쓱해졌다. 이왕 이렇게 된거 독백모드로 작가놀이 제대로 해보자싶다. 그렇다면 작가들이 밥대신 더 많이 먹는다는 '책'을 먹으러 가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느끼한 '책먹는 여우'속의 여우처럼 어슬렁 어슬렁 걸음으로 서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