홧병 치료비로 마시는 5,500원짜리 바닐라라떼
"잘난 척하지 마.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잘난 척 아니야. 네가 할 일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거야."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가르치려고 들잖아."
또 고장 났다. 이제 얼굴만 봐도 느낌이 온다. 전두엽이 과열돼서 회로가 타버려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로의 진입. 사춘기 회로가 열일을 하고 있나 보다. 저놈에 사춘기 회로는 왜 고장도 안 날까? 원망이 들지만 이럴 때 원망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수없이 겪었던 과거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렇게 터지면 결국 아무것도 하려고 들지 않는다. 오늘도 그럴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괜찮아진 듯하다가도 결국 사춘기 회로가 자극되며 터지면 도루묵이다. 그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나의 모든 노력들이 리셋돼서 허탈해지며 자괴감마저 밀려든다. 1학년 성적을 받고 아이도 나도 충격을 받았다. 중학교 성적은 예쁜 쓰레기라던데 우리 집은 그냥 쓰레기였다. 분명 100점 만점의 시험을 혼자서 50점 만점처럼 보고 왔으니 충격받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특히 집을 팔아도 성적이 오르기 어렵다는 국어는 더 형편없었다. 책을 어릴 때 그렇게 많이 읽어놓고서는 국어 성적을 이따구로 받사오니 사기꾼한테 당한 느낌이다.
"국어 학원은 다녀야 할 것 같아요."
어랍쇼? 스스로? 해결책을 내놓고 나에게 도와달라니. 언제 그랬냐는 듯 원망과 미움이 그 순간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나를 쥐락펴락하는 희대의 사기꾼이 확실하다. 다행인 것은 내가 낳은 이 희대의 사기꾼은 아직은 초범이라 양심이 있는듯했다. 사기꾼한테 사기당했다며 억울해하는 내 모습이, 남들이 보기엔 그저 철없는 엄마의 신세 한탄이겠지만 말이다.
"그~~ 으래? 그러면 엄마가 도와줘야지. 친구들 다니는 학원 대기해 놓을게."
난 또 이것이 덫인지도 모르고 아무런 의심 없이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걸렸다.
오랜 대기 끝에 20년 전통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다니기만 하면 성적을 올려줄 것 같은 국어학원에 등록했고 1시간 후면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사기꾼이 활동을 개시했다.
"엄마가 3시간 이랬잖아. 왜 4시간이야. 거짓말 쳤어."
"아냐. 데스크에 물어봤을 때 수업시간이 3시간 정도랬어. 중간에 쉬는 시간이 3번이라 끝나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래."
"아냐, 엄마가 처음에 3시간 이랬어. 그런데 길잖아. 이건 거짓말이야. 아 짜증 나."
사기꾼이 날 거짓말쟁이로 몰며 여론몰이를 시작했다. 고수들은 이럴 때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텐데 순간 이러다가 학원 안 간다고 할 것 같아서 마음이 다급해졌다.
"내가 언제 거짓말 쳤다고 그래? 네가 국어 학원 보내달래서 어렵게 등록했는데 시간 길다고 왜 짜증 내?"
상대가 싸움을 걸었고 난 거기에 넘어갔다. 어른인데 더 여유 있게 달랬어야 하는데 같은 수준으로 응수했다. 둘 사이의 목소리가 커지자 샤워하고 나와서 엄마와 학원 갖고 실랑이하는 모습을 본 아빠가 판결을 내린다.
"뭐 하는 거야? 그렇게 공부하기 싫으면 하지 마. 너한테 돈 쓰면서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해봤자 도움도 안돼. 하지 마."
"네."
사기꾼 원하는 걸 얻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자기가 언제부터 엄마, 아빠말 그렇게 잘 들었다고 아빠가 공부하지 말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번개같이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단전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 오른다. 이건 분명 미국정신학회에서도 인정한 국제질병분류 F34.8 (Other persistent mood disorders - 기타 지속적 기분 장애) 특히 한국인들한테 자주 발병한다는 Hwa-byung 증상이다.
판관 포청천이니? 이마에 초승달 그렸니? 왜 껴드는데? 이제는 화살이 남편한테 간다.
"당신 왜 그래? 살살 달래서 보냈어야지. 아, 난 몰라."
"저런 마음으로 학원 가봤자야. 영어도 수학도 다 끊어."
나도 화낼 줄 안다고요, 화병뿐만 아니라 울화통, 심통에 신체화반응까지 올라와서 두통, 신경통 다 있다고요. 하지만 남편말이 터무니없지 않기에 아군을 잃을 수 없으니 참는다. 문제의 원인은 남편이 아니므로 다시 사기꾼에게 간다.
"얼른 씻고 가자. 특강은 가기 싫으면 엄마가 빼줄게. 2학년 문법파트 어려워. 어떻게 하려고 그래."
('네가 보내달랬잖아. 나 힘들게 예약해서 돈도 다 냈는데 지금 장난해? 2학년때도 시험 이따구로 보면 가만 안 놔둬.'의 사회화버전으로)
"가만히 놔둬줘. 아빠가 가지 말랬으니까 안 갈 거야." 이러며 이불 뒤집어쓰고 핸드폰 속으로 숨는다.
순간 화병증상이 심화된다. 아빠탓 할 것도 없다. 결국 억지로 시키면 응당 치러야 할 대가이다. 어차피 안될 것 같아서 세게 나가버렸다.
"핸드폰 내놔. 앞으로 PC방 금지야. 그리고 국어, 과학 어떻게 공부할지 나한테 계획서 써서 갖고 와."
"알았어."이러며 핸드폰 주며 운다. 왜 우는 거지? 울사람은 난데. 나의 마음을 네가 알아? 억울하거나 속상해야 우는 건데 말이다.
"너는 네가 할 일도 제대로 안 하면 아무런 혜택도 받을 수 없는 거 알지? 학원까지 안 다니면서 공부 어떻게 할지 대안 마련해야지."
"인강 들을 거야. 그런데 내 카드는 줘."
"왜? PC방 갈라고? 그건 안 되지."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뭐 어쩌라고?
"그러니까. 지금 30분 남았으니까 씻고 가자. 엄마도 이러기 싫어. 무슨 인간으로 공부를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평소에 영어단어도 제대로 안 외우면서."
엄마의 비난 같지 않지만 비난을 느낀 사기꾼은 이성을 잃고 샤우팅을 시작한다.
"나 지난주에 31개 단어 맞았거든? 노력했어.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공부하고 살고 싶어. 나 내버려 둬."
"단어 시험 통과 한 번도 한적 없잖아. 인강보다 학원 가서 기초 닦고 그다음에 해봐. 너 못 믿어."
"내 인생이야. 내버려 둬."
이 와중에 20년 전통의 국어학원은 환불 절차마저 20년의 내공이 느껴질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홧병으로 손이 덜덜 떨리는데 앱을 켜고 환불 신청을 하니 3일 내로 입금된단다. 시스템이 구체적이라 더 열받는다. 나 같은 '선배 환불원정대'들이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 길을 닦아놨으면 이렇게 수월하단 말인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좋은 소리가 나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앱을 켜서 도서관 열람실 잔여좌석을 확인했다. 반 정도 좌석이 남아있었다.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도서관에 도착해 259번 좌석에 앉자마자, 뜨거운 바닐라라떼를 미친 듯이 들이켰다. 입안이 쓴 건지 내 인생이 쓴 건지 모르겠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 새끼를 사기꾼이라 부르며 이 생고생을 하는 건지. 학원비는 아꼈지만, 홧병 치료비가 더 나오게 생겼다. 도서관에 내가 찾는 답이 있을까? 아니, 답은 모르겠고 일단 이 홧병부터 좀 가라앉혀야겠다.
도서관으로 도망쳤지만 내가 찾는 답이 있을까? 아니,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이불 밖으로 나올 아이와 마주할 용기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환불된 학원비는 아이의 입시 자금이 아니라, 사춘기라는 폭풍을 견뎌낼 엄마의 멘털 관리 비용으로 써야겠다. 내가 더 단단해져야 너를 지킬 수 있을것 같아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