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옆의 남자들이 모두 떠난 좌석번호 383에서 노트북에 연신 타자를 쳤다. 출입문 가까운 좌석이라 출입이 편할 줄 알았는데 막상 가보니 맨 끝 벽에 붙어있는 좌석이었다. 의자를 뒤로 빼면 다른 사람이 지나갈 수 조차 없다. 낮에 내 자리에 가방 올려놨다고 범죄자 취급하며 속으로 원망했었는데 그들이 떠난 후 나도 똑같은 범죄자가 되었다. 양옆이 모두 비어버리니 비행기의 이코노미석 양옆이 비어 눕코노미의 행운을 맞은 것 마냥 편안했다. 아... 집에 가기 싫다. 다시 KBS 연속극의 팔자 더러운 속이 씨꺼먼 엄마 역으로 돌아가느니 전업작가로 남고 싶다. 채널을 돌리지 못하게 리모컨을 박살 내는 상상을 잠시해 본다. 하지만 낳아놨잖아. 책임져야지.
들어올 때만 해도 주차장 자리가 없어서 지하 2층까지 내려갔건만 저녁 시간이 지난 후에는 차들이 휑하니 몇 대 없었다. 출차 차단막 앞에 빨간색 6000원 숫자가 찍힌다. 처음 2시간 까지는 무료고 그 이후에는 시간에 따라 요금이 붙지만 아무리 오래 있어도 6000원까지다. 6000원이 최대니까 오래 있을수록 이익이다. 마음 같아서는 문 닫는 시간까지 여기 있고 싶다. 하지만 가야지.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이니 밥 줘야지.
아이보다 먼저 집에 가서 국이라도 끓여놓으려고 서둘러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어 익숙한 저 뒷모습.
남편이다. 구세주!
아들이 괴랄맞은 사춘기가 되자 부부가 동맹이 맺어졌다. 외부의 적이 있으면 내부에서 똘똘 뭉친다고 하더니 정말이다.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 내는 진정한 동료애가 솟아난다. 뒷모습만 봐도 왜 이리 반가운지.
"일찍 왔네? 말 잘 들어 역시"
"일찍 오라고 해서 왔지."
"저녁은? 우린 아직 안 먹었는데."
"어, 그래? 아들래미도 같이 외식할까?"
말해놓고... 잠시 숙연해진다.
"안 가겠지."
"맞아, 안 갈 거야."
호랑이새끼인가? 자기 이야기하니 출입문이 열리며 핸드폰에 코를 박고 들어온다.
"우리 셋이 동시에 밖에서 만났네?"
"그러게, 아들 저녁 밖에서 먹자."
"응, 난 안 갈래."
응, 이래서 간다는 줄 알고 잠깐 설렜잖아. 그러면 그렇지. 네가 그렇지. 사춘기에 들어서며 식당에서 외식을 거의 못했다. 무조건 집. 집 아니면 피시방에서 라면. 외식하자고 하면 배달의 민족답게 배달음식을 고집한다.
아기 때부터 시판 이유식 한번 사 먹이지 않고 매끼 정성껏 유기농으로만 해서 먹였다. 고기는 제일 부드러운 한우 안심을 쪄서 혹여나 목에 걸릴까 봐 절구에 쪘다. 더 어릴 때는 절구에 빻은 고기를 강판에 갈아가며 먹였다. 편식하지 않도록 골고루 먹이려고 정성을 다했건만. 이제는 매일 마라탕.
"나 마라탕 먹고 싶어."
어쩌라고? 그냥 중국인으로 태어나지 그랬어? 너 때문에 나는 지금 마라맛 육아체험 중인데 넌 마라탕이 넘어가니? 속사포랩으로 욕을 한바가지 해주고 싶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현실세계에서 짜증 내지 말자고 스스로 다독인다.
"마라탕 주말에도 먹었잖아. 엄마 아빠 돈 없다. 너~ 아르바이트해서 사 먹어. 호호."
안 웃겨 안 웃겨. 기가 막혀서 웃는 거야. 너 때문에 엄마는 언행불일치의 표본이 되어가고 있어. 이러다 인지장애 올까 봐 걱정이야.
나 혼자 있으면 분명 징징 댔을 텐데 우리 쪽 동맹 아빠가 있으니 적군이 살짝 주춤하다.
"그럼 뭐 먹어?"
"엄마가 우체국쇼핑에서 장어 사다 놨어. 그거 덮밥 해줄게. 간장맛 고추장맛 골라."
장어덮밥 먹을래?라는 옵션은 이미 없다. 메뉴는 장어니까 넌 소스맛을 골라야 한다. 이렇게 해야 말을 많이 안 섞을 수 있다.
"간장맛"
"오케이! 데리야끼로 해줄게. 옷 갈아 입어."
와... 정말 내가 재료 주문해서, 내가 요리하고, 내가 밥 주는데 이렇게 슈퍼 을의 자세여야 하다니.
다른 게 갑질이 아니다. 이런 게 사춘기 갑질 중에 상갑질이다.
식탁에 남에 살이 없으면 풀만 있다고 투덜 되니 항상 냉장고에 고기들이 대기하고 있다.
하교 후에 배고파, 학원 다녀오면 배고파, 밤에 배고파. 계속 배고파하니까 소화가 천천히 되는 고기류를 먹이는 게 차라리 낫다. 든든하게 먹여서 오랫동안 버틸 수 있게 말이다.
"장어꼬리 먹고 싶다. 꼬리 어딨 지? 헤헷."
먹을 때 잠깐 과거 어린이 때로 돌아갔다. 긴장과 경계막이 풀렸는지 웃어가며 장어꼬리를 찾는다. 네가 왜 꼬리를 먹는지 모르겠다. 어디 쓸 일이 있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꼬리는 왜 찾아? 어디 쓸 일 있어?"
남편이 여러 가지 의미의 질문을 던지자 웃겨서 물컵을 쏟을 뻔했다.
"야, 꼬리는 아빠 꺼야. 너 어디다 쓰려고 해?"
나도 한 술 더 뜨며 질문공세를 했더니 정말 해맑게
"꼬리에는 가시가 없잖아."
우리가 너를 너무 흑화 시켰다. 미안 아들.
2:1에서는 저분이 과하게 덤비지 않는다. 쪽수에 밀리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느낌이다. 신경질나고 자존심상하지만 오늘도 내가 져준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퇴근해서 같이 저녁먹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뭔가 가치있게 시간을 보내고 온 뿌듯함이랄까? 오늘하루 꽤 괜찮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저녁시간에 핸드폰만 보며 여전히 숙제를 하지 않지만 화가 덜난다. 도서관 효과가 끝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