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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스런 후후작가 Sep 04. 2024

맹모삼천지교와 집값의 상관관계

학군지 아이들

  어디든 그러하겠지만 아파트의 최고 좋은 위치에는 대형평수가 자리 잡고 있다. 비행기 좌석 가격에 따라 퍼스트-비즈니스-이코노미로 클래스가 나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단지에서 제일 소형평수에 속하는 우리 집은 비행기로 치면 이코노미클래스,  8차선 도로 앞 동이다.


도로변 아파트의 위력은 추운 겨울이나 아주 더운 여름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문을 꼭 닫고 생활하는 계절에는 못 느끼다가 거실 창문을 열어놔야 하는 봄가을이면 도로 위의 차소리가 시끄러워 티브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며칠만 지나도 거실창틀에 까만 먼지가 끼고 맨발로 돌아다니면 발바닥이 까맣게 변한다.


남편은 기존에 숲세권이고 커뮤니티 시설이 환상적이며 특히 지하주차장이 엘리베이터로 연결되었던 새 아파트를 그리워했다. 불편 투성이인 이 집도 돈을 모으고 모아서 영끌 대출까지 당겨서 겨우 이사할 수 있었다. 지금도 보너스와 주식 등 묶여 있던 돈들이 들어오면 바로 빚을 상환하려고 노력해서 꾸준히 갚아가고 있다.


  처음 이사했을 때는 은행 이율이 2프로 대여서 살만했었다. 변동금리는 2프로 대였고 고정금리는 3프로대여서 남편과 궁리 끝에 변동으로 택했었다. 그로부터 2여 년 후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끝없이 올라갈 때 변동금리를 택했던 우리 집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금리가 6프로에서 7프로에 들어서자 숨이 막혔다.


만약 한 달이라도 남편이 일을 하지 못해 월급을 받아오지 못하면 은행의 이자와 원금을 갚지 못한다는 생각에 삶의 여유가 사라졌다. 그즈음 남편과 말다툼이 많아졌다. 높은 이율로 이자비율이 높아져 월급은 로그인과 동시에 로그아웃되는 것처럼 스쳐 지나갔고 가끔씩 펑크 나는 달에는 마이너스통장에서 돈을 빼서 썼다.


평생 금리가 2프로 대라는 생각으로 대책 없이 너무 무리했던 결과였다. 집값은 전철역을 기준으로 한 블록씩 안쪽으로 들어갈 때마다 1억씩 가격차이가 났다.


-욕심부리지 말고 상황에 맞게 안쪽마을로 선택해야 했을까?

-생활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편의시설이 좀 적지만 가격이 저렴한 다른 동네로 선택했어야 하나?

-살던 아파트를 전세 주고 전세로 이동해야 했을까?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한 후회로 매일매 한숨이 나왔다. 영끌그지의 생활고에서 두 부부의 고민이 깊어져만 갔다. 다행히 아이가 한 명이고 크게 교육비 비율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아이를 좋은 동네에서 키우고 싶은 열망이 컸다. 친구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 어린 시절을 되도록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부모들의 교육 수준도 어느 정도 높고 아이들도 순한 환경을 바란 것이다. 그러면 아이가 자연스럽게 면학분위기에 젖어 들어 열공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무리하게 대출을 일으키고 새 아파트의 프리미엄을 포기한 채 30년도 더 된 구축으로 이사를 강행했다.


지내보니 맹모삼천지교가 어느 정도는 맞다. 미성숙한 아이들 일 수록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릴 때의 야생마 같던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들이 커가며 교정된 건지 주변 친구들이 순해서 받아준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정서적으로 편안해했다.

"엄마 친구들이 정말 친절해. 내가 회장선거에 떨어졌는데 우르르 와서 위로해 줬어."

확실히 아이들이 예의 바르고 학습 수준이 높았다. 눈에 띄는 차이점은 부모님이 아이들 일거수일투족 단속하며 아이들이 거기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타이트한 구속이 싫을 법한데 반항하거나 나쁜 짓을 할 구멍을 안주는 느낌이다. 아이들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에 해질 때까지 이집저집 몰려다니며 놀다가 이사 온 우리 집 아이는 처음에 심심해 죽을라고 했었다.

"엄마 놀 친구가 없어. 다 학원 간데."



  처음에는 너무 미안했다. 주말이면 전에 살던 동네로 데려다줬다. 친구들과 실컷 놀다 온 날에는 향수병이 더 진해져 여기 동네 싫다며 원망 섞인 말로 울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저학년 때 이사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바쁜 학원 스케줄과 과외활동으로 놀 시간 확보조차 힘들었다. 그러니 친구를 만나려면 학원에 가거나 따로 약속을 잡아 정말 짬을 내서 놀았다. 누구 하나 투덜대는 아이들이 없다는 게 신기했다. 평생 그렇게 살아와서 원래 삶이 그런 줄 알고 사는 아이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교육 잘 받고 자란 관리 잘된 아이들 속에 나의 아이도 동화되는 모습이 흐뭇했다. 학습지 하루 한 장 하기도 힘들었던 아이가 하루에 다섯 장씩 학습지를 해냈다. 왜냐하면 다른 친구들도 다 하니까. 영어학원을 다니며 영어도서관까지 다녔지만 즐겁게 다녔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면 친구들이 있으니까. 혼자가 아니면 억울하지 않으니까. 너도 하고 나도 하니 이게 정상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


아이들과 유일하게 뛰어놀고 운동하는 시간은 스포츠클럽 축구시간이었다. 그곳에서도 선생님의 지도하에 아이들은 정해진 규칙을 준수하고 축구 스킬을 배우며 어쩌다 골을 차면 행복 해 했다. 무리한 대출로 이사 왔어도 아이가 적응을 잘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만족스러웠다. 사춘기 오기 전까지는...




  끝없이 치솟던 금리가 차츰 떨어지고 주식에 묶여 있던 돈 일부를 찾아 빚을 상환했다. 우리는 금리가 떨어지는 추이를 지켜보다 4프로 초반대에 재빨리 고정금리로 묶어버렸다. 카카오뱅크는 중도상환수수료가 무료여서 언제든 상황이 가능한 장점이 있었다. 알뜰살뜰 모아 빚을 꽤 갚고 금리도 내리니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부부사이의 평화와 심리적인 안정감은 돈에서 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여유가 생기자 사람이 너그러워지며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다시 찾아왔다.


그 사이 우리 집은 재건축 선도지구 이슈로 집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높은 이율과 함께 떨어졌던 집값은 제위치로 올라왔고 인터넷상에 올라와있던 급매들과 저가 매물들이 종적을 감췄다. 재개발되거나 집값이 올라도 어차피 우리는 이 집에 계속 살아야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과거의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집값이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기존에 살던 새 아파트는 시설에 비해 입지가 떨어져서 새 아파트 프리미엄이 떨어지며 가격도 같이 떨어져 갔다. 매매를 해서 이사 온 우리와 달리 전세를 주고 전세로 이동한 친구는 후회를 했다.

  사춘기에 들어서며 아이는 자기주장이 강해지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했던 숙제들과 엄마가 내준 공부들에 대한 이의 제기를 하며 자신의 자유의지를 꺾지 말라며 바락바락 대들었다. 엄마 입장에서는 순종적으로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하게 굴면 좋겠지만 계속 그렇게만 큰다면 아이가 제대로 크지 못할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 커서도 엄마 나 모 하면 돼? 엄마 나 무슨 직업 갖을까? 엄마 나 휴가 언제 낼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한참 공부해야 하는 고등학교 때 사춘기 오는 것보다 지금 오는 게 낫다는 선배맘들의 조언대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고학년이 되면서 일찌감치 막대한 량의 공부를 해내던 몇몇 아이들이 번아웃이 되기 시작했다. 하루가 똑같은 24시간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영어, 수학, 논술, 운동, 악기까지 그 무엇도 소홀히 하지 않았던 아이들이었다. 아이가 잘 따라오기도 하고 능력도 되니 부모가 시켰겠지만 배터리를 쉼 없이 쓰면 방전되듯이 번아웃이 빨리 온 아이들은 일순간에 모든 걸 놔버렸다. 모든 걸 놓는 순간, 부모가 제일 무서운 순간이기도 하다. 사춘기가 온 지금 시점에서 나의 고민은 번아웃이 오지 않고 질리지 않게 잘 끌고 가는 것이다. 물론 이분은 자기가 알아서 더 시키지도 못하게 숙제량을 스스로 조금 해가곤 한다. 나는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스스로 번아웃 오지 않게 하려는 관리라고 생각하며 관망하고 있다. 옆집아이 대하듯 내 아이를 대해야 가정의 평화가 오니까.


아이의 교육을 위해 이동했지만 부모의 뜻대로 아이가 커주지 않았다. 열심히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전국의 잘하는 아이들이 모여서 그런가 상위층의 콘크리트벽은 절대로 깨지지 않았다. 성실하기도 하며 머리도 좋은 아이들과의 경쟁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느낌으로 와닿았다.


  공부도 할 놈 할 이고 공부를 다 한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잘한다고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닌 것을 뒤늦게 깨닫는 중이다. 이미 특목고에 갈 눈에 띄는 아이들이 보이고 영재에 가깝게 머리 좋은 아이들은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다. 다행히 우리 아이는 이런 상황에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욕심이 있어 노력하면 좋겠지만 스스로 의지가 없으면 끝까지 가기 힘들다. 부모의 역할은 스스로 의지가 생겼을 때 너무 기초가 없어서 시작도 못할 정도가 되지 않게 적당히 끌고 가는 것이다. 언젠가 치고 나갈 거라는 믿음으로 버티는 중이다. 하는 꼬락서니 보고 하다 하다 아니다 싶으면 교육비 회수해서 미국주식에나 투자해서 노후나 준비하련다. 교육 때문에 이사 왔는데 아이 성적보다 운좋게 집값만 오른 게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어쨌든 뭐라도 올랐으니 효도한 걸로 치자. 아들아 정말 고맙다. 웃으며 눈물이 나는 것은 기분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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