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운동을 찾았네.
장장 32회 개인 필라테스 수업이 끝났다. 유전자에 끈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에게 주 2회씩 꼬박꼬박 4개월간 빠지지 않고 수업을 듣게 해 준 힘은 비싼 레슨비이다. 레슨비가 너무 비싸서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다. 또, 수업 시간 동안 50분간 뽕을 뽑기 위해 오롯이 집중하며 정말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이건 나의 노력만은 아니다. 게으름쟁이에 실증대마왕인 나를 운동에 재미를 느끼게 해 준 사람은 필라테스 선생님이다.
수업의 흐름은 항상 비슷했다. 처음에 몸풀기 준비운동부터 시작해서 차분히 워밍업을 하고 최종동작의 완성을 위해 차분히 빌드업이 쌓아 결국 강도 높은 동작을 해내고 나서 뿌듯함까지 느끼게 해 주시고 수업이 마무리되었다. 각 동작들 사이사이에 항상 오른쪽 어깨관절과 무릎관절을 신경 써주셨다. 단순한 동작 하나 없이 나의 뇌를 내 몸이 조정할 수 있도록 인지와 동작을 연결하여 매우 스마트하게 수업이 진행되었다. 4개월이면 꽤 오래 친해질 법 한데 사설이 길어질 것 같으면 적당히 끈고 바로 수업에 집중시키는 부분도 매우 마음에 들었었다. 들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지금은 내가 변심해서 이토록 귀한 필라샘을 배신하고 헬스장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에게 돌아가 양볼을 꼬집고 정신 차리라고 하고 싶다.
필라테스에서 헬스로 운동을 바꾼 이유는 딱히 없다. 한 운동을 오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다양한 것에 대한 호기심이 커서 다른 운동을 원했기 때문이다. 필라테스에 불만이 있기보다는 다른 운동에 호기심이 컸다. 집에서 멀지 않은 헬스장위주로 상담을 받아보았다. 첫 번째 간 곳은 여름이 시작되기 직전 6월에 오픈하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헬스장이다. '헬스장은 언제 제일 싸냐고요? 오픈할 때죠~'이 문구에 혹해서 친구와 상담신청을 했다.
쿵쿵 쿵쿵 동탁둥탁둥탁~ 벌써 들어서는 입구부터 흥겨운 비트소리가 울려 가슴을 쿵쿵 치는 기분이었다. 헬스장 입구에는 스포츠 마사지받을 때 쓰이는 베드들이 놓여있고 회원들이 일제히 누워 트레이너들에게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헬스장이 아니라 스포츠 마사지샵으로 잘못 들어온 줄 알고 간판을 다시 확인해 보니 헬스장이 맞았다. 우리의 의문의 눈초리를 알겠다는 듯 상담실장이 반가이 맞이해 주며 상담실로 이끌었다. 제일 궁금한 가격은 말하지 않고 계속 자신의 성과, 주변 헬스클럽 험담, 운동효과를 장장 30분 넘게 계속 이야기했다. 운동하기도 전에 영업에 휘말려 피곤함이 올라오고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친구와 눈빛으로 여긴 아니라는 신호를 주고받았다. 결정적으로 오픈했는데도 불구하고 가격이 어마무시하게 비싸서 가정주부인 우리에게 무리였다. 입구에 배드에서 받는 스포츠 마사지 비용까지 모두 회원권에 포함된 것이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걸 느끼고 동네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헬스장으로 이동했다.
들어서는 입구부터 정리가 안되어서 짐이 쌓여 있는 모습이 마치 우리 집 서랍 위 옷 무더기 같아서 익숙했다. 직전 방문했던 헬스장은 고급스러움을 강조해서 보이는 모든 벽이 올블랙이어서 어두컴컴했는데 이곳은 천장에 샹들리에 전등이 밝게 빛나고 있고 온 벽이 화이트였다. 역시 내 취향은 밝은 데가 끌린다. 동네 봉식이 삼촌 같은 서글서글한 인상에 몸짱인 트레이너 선생님이 우리를 맞이하셨다. 이건 뭐 직전과 너무 비교돼서 이분은 영업에 관심이 전혀 없으신가? 왜 이렇게 무심하지? 이런 생각이 들게 우리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가격이다. 직전 헬스장의 반값도 안 되는 가격에 개인피티 10회 + 10개월 헬스장 이용 + 한 달에 5000원인 헬스복 제공까지 모두 제공된다. 둘이 함께 등록해서 개인피티 11회로 약속받고 바로 결재까지 완료했다. 이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마흔 살 넘게 살았으면서도 사람 보는 눈이 어찌나 어수룩 한지 다시 한번 나 자신이 한심하다.
상담부터 무심하고 털털한 pt선생님은 수업도 상담처럼 하셨다. 난생처음 pt를 받는 나도 이상함을 느꼈을 정도면 대부분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일단, 준비운동 없이 바로 기구에서 강도 높은 근력 운동을 시작한다. 디테일한 설명을 받으며 어느 곳에 힘을 주고 하다못해 발가락 하나하나 힘주는 것도 체크받았던 필라테스와 너무 비교돼서 환불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밥한술에 배부르랴. 조금 더 지켜보자.
기구 사용법을 배워 혼자서도 기구를 이용해서 근력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데 그것보다 다치지 않고 이 시련을 이겨내는 것으로 목적을 바꾸었다. 선생님이야 근육짱짱맨이니까 다 쉬운 동작들이지만 나는 초보자고 게다가 수술도 많이 받아서 무리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네 흔히 마주쳤던 봉식이처럼 생긴 봉선생님은 힘들어야 운동이 된다면서 계속 강도 높은 운동으로 50분 동안 끈임없이 시킨다. 그렇다. 이제부터는 생존이다. 스스로 지켜야 한다. 트레이너를 바꿀까? 생각도 했지만 10개월간 다녀야 하는데 마주칠 때마다 민망할 것 같아서 몇 회 안 되는 pt를 견디기로 했다. 나와 같이 등록한 친구도 비슷하게 느끼고 대충 기구 사용법 배워서 우리끼리 운동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헬스장을 처음 다녔으면 몰랐겠지만 직전 필라테스에서 최상급 케어의 맛을 봤기 때문에 지금 받는 pt는 마치 유격훈련처럼 이를 악물게 했다. 속으로 불평불만이 쌓이려는데 봉식이 닮은 헬스 선생님이 게다가 수다쟁이이기까지 한 것이다. 나는 운동을 하러 갔는데 중간중간 근력운동하고 쉬는 타임에 수다를 어찌나 떠시는지 모른다.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말이 더 많다고들 하는데 그 말을 실감했다. 우리 남편이 과묵하고 말이 없어 그런가 무생물 같다고 놀렸었는데 이분은 덩치와 안 어울리게 촉새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셨다.
'선생님 제발 운동에 집중해 주세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무게를 계속 올려서 복수할 까봐 참았다. 상체 운동할 때는 중간에 수다 떨다가 개수를 잘못 세서 정정한 일이 있다.
"셋넷다섯..... 다섯."
"아니에요. 여섯이에요." 땀 뻘뻘 흘리며 원망의 눈초리로 이야기했더니 눈으로 나를 응시하길래
"어. 선생님 눈으로 욕했다 그렇죠?"
"여섯, 아 그러니까 개수 샐 때는 말 걸면 안 된다니까요."
나 참 본인이 신나서 이야기해놓고는 봉식이 선생님 성질 있네.
그런데... 천년만년 길게 느껴졌던 필라테스와 다르게 얼렁뚱땅 피티시간은 시간이 쏜살같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속으로 '필라테스 선생님은 근육 안 다치게 신경도 많이 써주시고 설명도 자세히....' 이렇게 불평하며 비교하는 시간조차 무색할 정도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심지어! 봉식이 선생님과 3회 차 정도 수업을 진행하니 수다 떨며 운동하는게 익숙해져서 수다 내용이 재밌기까지 하다!
게다가 연애들의 울룩불룩 근육 짱짱맨들이 하는 상체 운동의 자세나 허벅지 근육 터질 것 같이 힘든 하체운동 할 때 뭔지 모르겠지만 마치 나도 비슷한 동작을 하고 있으면 마치 그들처럼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필라테스는 정적인데 힘들어서 나와의 인내심 싸움 같다면 헬스는 쿵쿵 쿵쿵 음악 비트에 맞춰서 파워풀하게 힘쓰니 마치 힘든 노동을 큰 동작으로 해내는 느낌으로 스트레스가 풀렸다. 게다가 봉식이 선생님이 나보고 근력이 나쁘지 않다고 무게를 자꾸 올리고 있다. 저질체력이었는데 필라테스하며 속근육이 생긴 것 같다.
일단 출발이 나쁘지 않다. 10개월 회원권 끊어놨으니 적어도 주 2회는 꼭 가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 2주하며 샐러드 단백질 위주로 챙겨 먹고 신경 조금 썼더니 몸무게도 줄어 있다.
뭐지? 인생운동 찾은 건가? 살까지 빠지다니. 대체 운동하면 왜 기분이 좋아질까? 움직이면 뇌가 살아나는 기분이 든다. 바닷속 성게는 뇌가 없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체가 되어 더 이상 움직일 필요가 없어지는 시점에 스스로 뇌를 먹어버린다고 한다. 운동 안 해서 내 몸이 뇌를 먹어버리기 전에 대충대충 봉식이 피티샘과 스트레스 없이 운동해 봐야겠다. 피티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