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찾는 것이 답을 찾는 것보다 중요한 시대
우리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상을 바꾸는 역사적 변곡점에 서 있습니다. ChatGPT가 등장한 지 몇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이미 우리의 업무 방식, 학습 방법, 심지어 사고하는 패턴까지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58년 전, 한 학자가 제자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오늘날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놀라운 통찰을 제공합니다. 바로 위대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이야기입니다.
1966년 2월 3일,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 제자 고이치 마노(Koichi Mano)에게 보낸 편지는 『완전히 합리적인 일탈(Perfectly Reasonable Deviations From the Beaten Track)』이라는 서신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https://fs.blog/richard-feynman-what-problems-to-solve/
마노는 축하 인사와 함께 자신의 근황을 전했습니다. 그는 "전자기파가 난류 대기를 통과할 때의 전파에 관한 간섭 이론을 연구하고 있다"며 자신의 연구를 "겸손하고 현실적인 문제(humble and down-to-earth type of problem)"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에서 파인만은 제자의 마음속 깊은 고민을 읽어냈습니다. 파인만은 제자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진정 가치 있는 문제란 당신이 실제로 해결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당신이 실제로 무언가를 기여할 수 있는 문제들 말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연구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당신이 하찮다고 부를 수많은 문제들을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들을 즐겼고, 때로는 부분적으로나마 성공할 수 있어서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예를 들어, 고도로 연마된 표면에서의 마찰 계수 실험(실패했지만), 결정의 탄성 특성이 원자 간 힘에 어떻게 의존하는지, 전기도금된 금속을 플라스틱 물체에 어떻게 붙게 할지(라디오 손잡이 같은), 우라늄에서 중성자가 어떻게 확산되는지, 유리에 코팅된 필름에서 전자기파의 반사, 폭발에서 충격파의 발달, 중성자 계수기 설계, 왜 어떤 원소들은 L궤도에서 전자를 포획하지만 K궤도에서는 그렇지 않은지, 특정 유형의 어린이 장난감을 만들기 위해 종이를 어떻게 접을 것인가에 대한 일반 이론(플렉사곤이라고 불리는), 가벼운 핵의 에너지 준위, 난류 이론(성공하지 못한 채 몇 년을 보냈지만) 등등..."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문제의 크기가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여도, 우리가 실제로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너무 작거나 하찮은 문제는 없습니다."
기존에는 문제가 주어지면 답을 찾는 것이 주된 과제였습니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고,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고,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과정이 핵심이었죠.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지만, 결국 '어떻게 풀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AI 시대는 문제의 답을 찾는 시대가 아닙니다. ChatGPT에게 물어보면 몇 초 만에 복잡한 수학 문제를 풀어주고, Claude는 코딩 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해주며, 심지어 창작까지도 도와줍니다. 정보 검색, 번역, 요약, 분석 등 기존에 시간이 많이 걸렸던 작업들이 대부분 자동화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라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즉, 문제를 찾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구글의 전 CEO인 에릭 슈미트는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 올바른 답을 얻는 것보다 더 어렵다.(We run this company on questions, not answers, October 2, 2006, TIME)"고 말했습니다. AI 시대에 이 말은 더욱 현실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예를 들어, AI에게 "매출을 늘리는 방법을 알려줘"라고 물으면 수십 가지 일반적인 답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의 20-30대 고객층이 3개월 만에 40% 이탈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훨씬 더 가치 있는 답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차이점은 명확합니다. 첫 번째는 '일반적인 문제'이고, 두 번째는 '구체적이고 해결 가능한 문제'입니다.
1966년 파인만의 가르침이 AI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파인만은 이미 그때 알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큰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찾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파인만의 편지에서 주목할 점은 그가 자신의 연구 주제들을 나열할 때의 솔직함입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그도 "실패한 연구", "성공하지 못한 채 몇 년을 보낸 연구"가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과정에서 얻은 기쁨과 성취감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제 우리는 AI의 도움을 받아서 스스로 문제를 찾아가는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AI가 답을 주는 것에 의존하기보다는, AI와 함께 더 나은 문제를 발견하고 정의하는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AI 시대에 뒤처질까 봐 걱정합니다. 특히 IT 전문가가 아닌 현업 근무자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IT 전문가가 아닌 현업 근무자들에게 더 큰 희망과 기회가 있습니다.
왜일까요? IT 전문가들은 기술적 해결책에 능숙하지만, 정작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는 분야, 필드, 업종의 진정한 문제는 외부에서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이라고 해도, 당신이 매일 마주하는 현장의 미묘한 문제들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몇 가지 실제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경력이 쌓인 품질관리 담당자는 "기계 A의 소음이 평소와 다를 때 3시간 후에 불량품이 나온다"는 패턴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미묘한 신호는 AI가 데이터만으로는 발견하기 어렵죠. 초등학교 선생님은 "아이들이 점심시간 직후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가 급식실의 특정 메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간호사는 "특정 시간대에 환자 호출이 급증하는 이유가 병실 온도 조절 시스템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그 분야에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도메인 전문성'과 '현장 경험'입니다. 데이터로는 잡히지 않는 미묘한 신호들, 고객의 표정 변화, 동료들의 작은 불만 등은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만이 포착할 수 있습니다.
파인만은 편지의 마지막에서 제자에게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 찾은 문제에 집중하라. 당신은 이름 없는 사람이 아니다. 당신의 아내와 자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고, 동료들의 간단한 질문에 답해줄 수 있다면 그들에게도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는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남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발견하고 정의한 문제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 문제가 아무리 작아 보여도, 내가 실제로 해결할 수 있다면 진정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 문제를 찾고, AI와 함께 해결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준 새로운 기회입니다. 파인만이 제자에게 전한 따뜻한 조언이 오늘날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희망과 방향을 제시합니다. 답을 찾는 것은 기계에게 맡기고, 우리는 더 나은 질문과 문제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해봅시다. 우리 스스로 발견한 문제, AI와 함께 찾아낸 해결책이 세상을 조금씩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