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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측정 없이 개선 없다. AI시대 새로운 나침반

AI 성숙도 평가가 보여주는 측정의 철학과 미래 방향

by 서지삼

AI 성숙도 평가의 등장과 그 철학적 의미: 새로운 경쟁력 지표의 탄생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측정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If you can't measure it, you can't improve it)"라는 명제를 통해 측정의 근본적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단순해 보이는 문장에는 조직과 사회 발전의 핵심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현재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면 목표 설정도, 진전 확인도, 개선 방향 도출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공지능 시대를 맞은 오늘날, 우리는 드러커의 이 명제 앞에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AI 기술이 산업과 사회 전반을 급속히 변화시키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이 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있는지, 경쟁자들과 비교해 어느 위치에 있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는 도구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나침반 없이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AI 투자는 늘어나고 있고, 관련 정책들도 쏟아지고 있지만, 이러한 노력들이 실제로 조직과 국가의 AI 역량 향상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평가할 기준이 없었던 것이죠. 더 근본적인 문제는 AI 성숙도라는 개념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조차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측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입니다. AI 성숙도를 평가한다고 할 때, 우리는 기술적 역량만을 볼 것인가, 아니면 조직 문화와 거버넌스까지 포함할 것인가? 개별 기업의 내부 역량에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글로벌 경쟁 환경 속에서의 상대적 위치를 중시할 것인가? 정부 주도의 하향식 접근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민간 중심의 생태계적 관점을 택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각각의 측정 방식은 AI 성숙도에 대한 서로 다른 철학과 가치관을 반영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AI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최근 몇 년 사이에 세계 주요 연구기관들과 컨설팅 회사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AI 성숙도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프레임워크들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제시하는 평가 모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겉으로는 모두 'AI 성숙도'라는 동일한 목표를 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렌즈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같은 산을 서로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며 각각 다른 등반로를 제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글에서는 대표적인 세 가지 AI 성숙도 평가 프레임워크를 통해 각기 다른 측정 철학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살펴보고, 이러한 차이가 가지는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해보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독자적인 AI 성숙도 평가 체계를 구축할 때 어떤 철학적 기반을 선택해야 할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세 가지 대표적 평가 프레임워크의 실제 모습


ServiceNow: 조직 내부의 실행력에 집중하는 관점

ServiceNow의 Enterprise AI Maturity Index는 "우리 회사는 AI를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2025년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16개국 11개 산업 분야의 리더 4,47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평균 AI 성숙도 점수가 100점 만점에 35점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작년 44점에서 9점이나 하락한 수치로, AI 기술 혁신의 속도가 기업들의 도입 역량을 앞지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주목할 점은 상위 18.2%에 해당하는 '선도기업(Pacesetter)' 그룹의 존재입니다. 이들은 다섯 가지 핵심 전략을 통해 차별화된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혁신적 사고방식으로 AI를 단순한 문제 해결 도구가 아닌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기업 전반에 걸쳐 AI 기능이 내장된 단일 플랫폼 접근 방식을 채택합니다. 또한 인재 확보와 교육에 집중하며, 체계적인 AI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에이전트 AI(자율적으로 행동하는 AI)를 적극 수용하고 있습니다.


ServiceNow의 철학은 명확합니다. AI 성공의 열쇠는 외부가 아닌 조직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응답 기업의 67%가 AI를 통해 총이익이 평균 11% 증가했다고 보고하는 등, 체계적인 내부 실행력이 가시적인 성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BCG: 글로벌 경쟁 구도 속 전략적 포지셔닝 중시

BCG의 AI Maturity Matrix는 "우리나라는 글로벌 AI 경쟁에서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기회와 위험에 처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73개국을 대상으로 한 이 평가의 독특한 관점은 AI 준비도(Readiness)와 함께 경제가 AI로부터 받을 영향, 즉 노출도(Exposure)를 함께 고려한다는 점입니다.


준비도는 ASPIRE라는 6대 지표로 측정됩니다. 야망(Ambition)은 국가 전략과 전담 기관의 존재를, 기술(Skills)은 전문가와 기술 커뮤니티 활동 수준을, 정책(Policy)은 규제 품질과 데이터 거버넌스를, 투자(Investment)는 유니콘 기업과 벤처캐피털 투자 규모를, 연구(Research)는 논문과 특허 그리고 스타트업 생태계를, 생태계(Ecosystem)는 인프라와 클라우드 서비스 수준을 평가합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국가들은 6가지 유형으로 분류됩니다. AI 선도국(Pioneers), 안정적 경쟁국(Steady Contenders), 부상하는 경쟁국(Rising Contenders), 노출된 실행국(Exposed Practitioners), 점진적 실행국(Gradual Practitioners), AI 신흥국(Emergents)로 구분되며, 우리나라는 현재 '안정적 경쟁국' 그룹에 속해 있습니다.

BCG의 접근법은 마치 체스 게임에서 자신의 말뿐 아니라 상대방의 위치까지 고려하여 전략을 짜는 것과 유사합니다. 단순히 내부 역량만 강화한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경쟁 구도 속에서 자국의 전략적 포지션을 찾아야 한다는 지정학적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IDC: 생태계의 균형 잡힌 성장을 추구

IDC의 Asia/Pacific AI Maturity Study는 "우리 국가의 AI 생태계는 얼마나 건강하며, 지역 내 경쟁력은 어떠한가?"를 묻습니다. 아시아/태평양 8개국을 대상으로 한 이 평가의 철학적 특징은 국가를 하나의 유기적 생태계로 본다는 점입니다.


IDC는 국가의 AI 성숙도를 기업(45%), 사회경제(40%), 정부(15%)라는 세 축으로 나누고 가중치를 차등 적용하여 평가합니다. 이러한 가중치 배분이 보여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기업과 사회에 85%의 비중을 둔 것은, AI 성공이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의 활력과 사회적 기반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반영합니다.


평가 결과에 따라 국가들은 4단계의 성숙도 레벨로 구분됩니다. AI 탐색가(Explorer)부터 시작하여 실행가(Practitioner), 혁신가(Innovator), 그리고 최고 단계인 리더(Leader)까지의 여정을 제시합니다. 이는 숲의 건강이 개별 나무들의 성장과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는 생태계적 사고와 맥을 같이 합니다.


세 철학의 근본적 차이점 이해하기

이제 각 평가가 담고 있는 철학의 차이를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학문적 관심사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AI 성숙도를 발전시켜야 할지에 대한 실질적인 통찰을 제공합니다.


ServiceNow의 철학은 '내부 역량 강화(Inside-Out)' 접근법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가장 중시하는 가치는 '실행과 통합(Execution & Integration)'입니다. 마치 집을 짓기 전에 기초를 튼튼히 다지는 것과 같은 접근으로, 외부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내부 실행력을 강화하면 AI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적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BCG의 철학은 '전략적 포지셔닝(Positional)' 사고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핵심 가치는 '경쟁 우위(Competitive Advantage)'입니다. 이는 단순히 내부 역량이 뛰어나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처한 환경(노출도)을 정확히 인지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관점을 보여줍니다.


IDC의 철학은 '생태계 시너지(Ecosystem-driven)' 접근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균형 잡힌 성장(Balanced Growth)'입니다. 어느 한 주체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각 구성 요소들이 시너지를 낼 때 국가 전체의 AI 성숙도가 높아진다는 관점입니다.


우리나라의 AI 성숙도 평가 개발을 위한 과제

이제 우리나라도 자체적인 AI 성숙도 평가를 개발해야 할 시점에 와 있습니다. 이미 일부 컨설팅 회사들과 연구기관들이 한국 기업의 특성을 반영한 AI 성숙도 진단 도구 개발에 착수했으며, 향후 1-2년 내에 국내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평가 서비스가 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 제조업 강국인 우리나라의 특성을 고려하여 스마트팩토리와 AI 융합, 그리고 빠른 기술 도입 문화 등을 반영한 평가 지표들이 포함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부 내에서 비슷한 평가가 등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각 부처의 AI 도입 수준과 활용 성과를 체계적으로 진단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평가를 개발하는 것이지요. 이는 단순히 기술 도입 여부를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서, 각 부처가 국민 서비스 향상과 행정 효율성 제고를 위해 AI를 얼마나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를 종합적으로 평가하려는 시도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평가 도구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ServiceNow, BCG, IDC의 사례에서 보듯이, 어떤 철학적 기반 위에서 무엇을 측정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평가의 성공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발할 평가 체계가 한국의 독특한 문화적 맥락과 경제 구조, 그리고 정부와 민간의 협력 방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정교한 지표라 하더라도 실질적인 개선으로 이어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어떤 철학적 기반을 택할 것인가입니다. 우리는 실행력을 중시하는 ServiceNow의 관점을 택할 수도 있고, 글로벌 경쟁 속 포지셔닝을 강조하는 BCG의 시각을 따를 수도 있으며, 생태계의 균형 잡힌 성장을 추구하는 IDC의 접근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의 독특한 상황과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 접근법을 개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강점인 빠른 기술 도입 속도와 높은 디지털 리터러시, 그리고 정부와 민간의 협력 문화 등을 고려한 새로운 평가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가 BCG 보고서에서 '안정적 경쟁국'으로 분류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이는 우리가 상당한 AI 준비도를 갖추고 있지만, 아직 선도국 그룹에는 진입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만의 평가 체계는 현재의 위치를 정확히 진단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로드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AI 성숙도 평가가 가지는 더 큰 의미

결국 AI 성숙도 평가는 단순한 측정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AI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를 보여주는 나침반입니다. 그 나침반에 어떤 철학적 방향을 새길 것인지가 앞으로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 할 과제입니다.


ServiceNow가 보여주듯이 내부 실행력의 체계적 강화가 중요한지, BCG가 제시하듯이 글로벌 경쟁 구도 속에서의 전략적 포지셔닝이 핵심인지, 아니면 IDC가 강조하듯이 생태계 전체의 균형 잡힌 발전이 우선인지에 대한 선택은 단순히 학술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AI 시대를 맞아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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