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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길31, 세월아 네월아 산티아고 순례길 31.

-페르시아노델레알 카미노에서 렐리에 고스까지(20.6km)

by 지구 소풍 이정희
페르시아노델레알 카미노 알베르게를 떠나며


어제저녁부터 내리던 비가 오늘 하루 내 온다는 일기예보에 순례자들은 비상이다. 그나마 오전에는 약한 비가 오후에는 많이 올 거라는 이야기가 순식간에 전해진다.

모두 아침 5시에서 6시 정도 일찍 출발해야 한다며 미리 가방을 싸놓고 바지와 윗옷을 입은 채 저녁 8시부터 잠을 잤다.

새벽 6시 일어나니 아직은 어두운 시간인데 알베르게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거의 떠났거나 떠날 준비를 마치고 나간다.

함께 방을 사용했던 한국인들도 6시가 조금 넘자 후다닥 떠났다.

6시 40분 마당에 나가니 아직 어둡고 보슬비가 내린다. 핸드폰 조명을 켜고 알베르게를 나와 어둠의 마을을 걷기 시작한다.


깜깜한 숲길에 반딧불처럼 순례자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우비를 쓰고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을 걸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이런 경험 평생 처음이야!'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어둠이 걷히자 비가 점점 굵어졌다. 오래된 십자가상까지 지나치면 작은 집들이 보이며 2시간 만에 마을을 만났다.

라면 파는 바

엘 부르고 라네로는 인구가 300명도 안 되는 조그마한 마을이고 순례자에게 필요한 알베르게, 작은 식료품점, 카페와 바 등이 있는 곳이다.


아침 8시 반, 이른 시간이 아닌데도 거리에는 간혹 순례자들만 보일뿐 마을 사람은 보이지 않고 빈 마을 같았다.

맨 아래 왼쪽 신라면, 햇반 메뉴


불이 환한 바에는 아침을 먹으려는 순례자들로 가득하고 메뉴판에는 한글로

"신라면 5.5유로, 햇반 3.5유로, 젓가락도 줍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라면이 먹고 싶다고 하자 부지런한 한국인들이 7시 반 문 열자마자 와서 신라면을 주문하여 벌써 매진이라며 주인은 한국말로 인사한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맛있는 사과 파이와 커피를 먹고 일어나자 부산에서 퇴직하고 바로 온 한국인 부부를 네 번째로 마주쳤다.

부부가 인상이 선하고 목소리가 차분한 것이 참 좋아 보인다.

산 페드로 교구 성당

마을 끝에 엘 부르고 라네로의 산 페드로 교구 성당(Iglesia Parroquial de San Pedro)은 오래되어도 변하지 않을 수수한 모습이다. 비 맞으며 서두르는 례자들에게 마실 물을 나누어주며 배웅한다.


다음 마을 렐리 고스까지는 13km 정도 남았다. 자동차 도로와 나란하게 지나는 자갈길은 비 오는 날이라 자그락자그락 발소리를 낸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지나며 밟고 밟아 큰 돌들이 저렇게 아기 손톱보다 작아졌겠지.

백령도 거친 파도를 맞아주던 몽돌해변 잔돌들의 아픈 소리 같았다.


쉼터

가끔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순례자 쉼터를 발견하면 반가워서 뛰어간다. 근처의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노상방뇨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익숙해져 앞서가는 사람이 길 옆으로 비겨가면 그러러니 한다.


와! 340km 남았다

산티아고까지 거리를 알려주는 표지석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세월아 네월아 거북이인 내가 제일 기쁘고 아쉬운 순간이다.

가끔 한국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때 제일 먼저, 생장에서 언제 출발했느냐고 묻곤 한다. 서로 걸은 거리와 시간을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9월 12일 이후 걷기 시작해서 28~35일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나는 9월 4일 시작하여 10월 21일까지 47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하면 모두 웃는다.


"여행처럼 즐기시네요"

"네, 지구소풍 즐기고 있어요"


길 친구와 걷다 보니 지치지 않고 빨리 걷게 된다. 혼자 왔지만 둘이 함께 걸으니 좋은 점이 많다.


오늘 아침처럼 어두운 숲길을 걸을 때는 서로가 있어 좋다고 말했다. 방금 전에도 길에 뱀 껍질도 보이고 커다란 들쥐도 지나가서 깜짝 놀랐다.


'혼자였으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대규모 옥수수밭

가도 가도 집이 보이지 않는 대평야이다. 검게 말라가는 해바라기들 바로 옆에 농구 골대만큼 키가 큰 옥수수들이 비바람에 끄덕하지 않는다. 보기에는 가늘고 높이만 자란 것 같은데 수염뿌리가 튼튼한가 보다.

사람도 겉보기와 다른 경우가 참 많다. 옥수수처럼 별 볼일 없이 비어 보여도 심지가 굳어 흔들려도 잘 버티어 내는 사람이 진국이다.


두 번째 마을, 렐리에 고스(Reliegos)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 알베르게 건물 중앙에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여기도 한국 사람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비바람에 흠뻑 젖은 순례자들이 쉼터와 버스정류장에 앉아 쉬고 있다. 물에 젖은 생쥐처럼 앉아 딱딱한 바게트 빵을 맛있게 먹고 있다.

눈물 젖은 빵이 아니라 비에 젖은 빵을 뜯어먹으며 손을 흔든다.


"부엔카미노" "올라"


우비 안으로 비가 스며 온몸이 축축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저들의 환한 모습에 에너지를 받는다.


'이 맛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다시 찾는구나!'


오늘의 숙소

오늘 20.3km 걷고 이 마을에서 쉬어간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6km 더 걸어 규모가 큰 만시야까지 가는 사람들이 많다.


비바람이 점점 거칠어지는데 지체되고 속도도 나지 않을 텐데 우비도 없는 젊은이들이 걱정이 된다.


구간이 끝나는 큰 마을은 알베르게도 많지만 숙박하려는 사람도 많아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는 경우가 많다. 전 마을이나 지난 마을의 알베르게에서 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맨 안쪽 창문아래 내 침대

이메일로 예약한 알베르게 LA Palada가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깔끔하다. 이층 침대는 12유로, 싱글 침대는 15유로이다. 난간 없는 이층 침대는 무서워서 3유로 더 비싼 싱글 침대를 선택했다.

비 오는 알베르게 정원

일찍 출발하여 부지런히 걸은 덕에 12시에 도착했다. 비가 오는데 체크인 시간이 2시부터 라며 문밖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현관에 가방을 세워놓고 마을산책을 했다. 비바람에 우비가 펄럭거리는 순례자들이 미리 예약을 안 해서 여기저기 알베르게를 찾아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일찍 체크인 안 해주는 알베르게 주인을 미워하다 저렇게 헤매는 순례자들을 보며 가방이라도 보관해 주는 것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풀어졌다.


1등으로 체크인하여 자리도 안쪽 좋은 곳을 선택할 수 있었다.

널찍한 꼭대기 방에 하늘이 보이는 커다란 창문이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얼른 뜨거운 샤워를 하고 혼자 커다란 방 나무 침대에 누우니 유리창문에서


'똑똑똑'

'후드득후드득'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동화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외국 다락방 같기도 하다.

천정은 나무옹이가 무늬처럼 새겨져 있는데 비가 와서 나무향이 은은하다.


커다란 유리 창문 너머 먹구름이 움직이고 새떼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저녁 비가 그치면 밤하늘에 별이 보일까 기다려지고 설렌다. 벌써 오늘 비바람은 모두 잊혔다.

오늘 숙소는


어둠 속 비바람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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