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길 27, 호주

시드니 2 - 하늘

by 지구 소풍 이정희

1. 하버브리지(Harbour Bridge) 전망대

1932년 개통식 입구 한글설명
하버브리지 클라이밍 하는 사람들

호주에 다녀왔다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묻는다.
“시드니 하버브리지? 오페라 하우스?”
질문 속에서 나는 다시 다리를 떠올린다. 바다와 하늘을 잇는 거대한 아치, 시드니의 상징이자 수많은 여행자들의 발길이 향하는 곳.


하버브리지는 1923년에 착공해 1932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90여 년 전, 지금처럼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저 거대한 강철 아치를 세웠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이 다리는 단순히 철과 볼트로 이어진 구조물이 아니라, 인간이 하늘과 바다를 향해 건넨 간절한 다리 같았다.

시드니 사람들은 ‘옷걸이’라 부른다지만, 내 눈에는 세월을 견디는 삶의 무게가 담긴 어깨처럼 보였다.


오랫동안 다리 꼭대기까지 오르는 ‘클라이밍 투어’를 꼭 해보리라 다짐한 적이 있다. 은퇴 전, 몸이 한창일 때였다.

하지만 몇 해 전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며칠을 앓고 난 뒤, 나는 내 몸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모험보다 무리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번 시드니에서도 클라이밍은 포기하고 대신 파이온 룩아웃 전망대를 찾았다. 전망대에 서자 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시드니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아래로 그림처럼 펼쳐진 항구, 하얀 조개껍질 같은 오페라 하우스, 바다 위를 바쁘게 오가는 배들… 그 풍경은 황홀했다. 문득 우리나라 통영 미륵산에 올라 한려수도의 바다를 바라보며 느꼈던 경외심이 겹쳐졌다. 인간이 만든 조형물과 자연이 빚은 바다가 아름답게 닮아 있었다.


전망대 맞은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다리 위를 걸어 오르고 있었다. 안전 장비를 착용한 사람들이 줄지어 아치를 따라 오르는 모습은 오랫동안 남았다.

나도 한때는 저곳에 오르기를 꿈꿨지만, 지금은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뭐든 때가 있구나.’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참이나 그들을 바라보았다.


해마다 새해 첫날, 이 다리와 오페라 하우스, 달링하버를 배경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불꽃놀이가 펼쳐진다고 한다. 그때의 풍경은 얼마나 장엄할까. 아직 보지 못했지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은퇴 후의 여행은 꼭 눈앞의 체험만이 아니라, 이렇게 미처 보지 못한 풍경을 마음속에 그려 넣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리를 걷는 길은 록스에서 시작해 밀슨스 포인트 역까지 이어진다. 중간중간 들려오는 한국어 대화, 휴가를 즐기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다리 위 바람과 함께 흘러갔다. 안전요원들이 뜨거운 태양을 피해 대형우산을 쓰고 서 있는 모습마저, 오늘의 풍경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홀로 떠난 은퇴여행이지만,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다리 위를 건너며 과거의 나와 마주했고, 전망대에서 미래의 나와 대화했다. 하버브리지는 단순한 교량이 아니라, 내게는 지나온 삶과 남은 여정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2. 시드니 시내 헬기 투어

헬리콥터에 오르기 전, 잠시 가슴이 뛰었다. 은퇴 후에도 여전히 설레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세월이 흘러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하늘을 향한 갈망이 남아 있었다.

비싼 요금이 부담스러웠지만, 다른 사치를 줄이더라도 이 비행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삶에서 몇 번이나 하늘을 난다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기장은 환한 미소로 내 카메라를 받아 들고 헬리콥터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작은 기체의 문이 닫히고, 엔진의 떨림이 심장을 두드리듯 전해졌다. 곧 바퀴가 지면을 떼고, 시드니의 하늘이 열렸다.


헬기는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고요히 미끄러지듯 날았다. 발아래로 펼쳐진 보타니 만, 그 끝없이 이어지는 바닷빛은 청록과 옥빛을 섞어놓은 듯 눈부셨다. 240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선 곳곳에 자리한 해변과 정원, 수풀 지대가 햇살에 반짝였다.

시드니의 바다는 놀이터처럼 활짝 열려 있었고, 그 곁에는 인간이 만든 건축물들이 저마다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페라 하우스, 하버브리지, 고층 빌딩들… 땅에서 볼 때는 웅장했던 것들이 하늘에서는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모형처럼 작아 보였다.

왓슨스 베이와 로즈 베이, 본다이 비치가 차례로 스쳐 갔다. 해안선을 따라 잔잔히 이어지는 파도는 늦여름 햇살 속에서 수정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 장면 앞에서 오래전 청춘의 바닷가를 떠올렸다.


바다는 늘 같지만, 바다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나이와 함께 달라져 있었다.

젊을 땐 모험과 자유를 상징하던 바다가 이제는 고요와 위로의 얼굴로 다가왔다.

수평선 너머로는 태평양이 아득하게 이어졌고, 멀리 블루마운틴의 푸른 능선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조종사는 헤드셋 너머로 농담을 던지며 승객들의 웃음을 유도했다. 영어가 서툰 나조차 몇 번이고 소리 내 웃었다. 언어를 뛰어넘는 것은 결국 마음의 떨림이라는 것을, 다시 배웠다.


비행은 너무 짧았다. 수없이 사진과 영상으로 보아왔던 풍경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시간은 한순간에 흘러가버렸다. 하지만 그 찰나의 경험이 내게 준 울림은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

헬기 창 너머로 내려다본 시드니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삶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체험이었다.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버티지 말고 걷자. 용기를 달리자. 그리고, 꿈을 날자.”


하늘에서 내려와 다시 땅을 밟았을 때, 발걸음은 이전보다 가벼웠다. 은퇴 후의 삶도 이 비행처럼,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안고 새로운 시야를 열어가는 여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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