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길 49, 뉴질랜드 16

엄마와 딸, 뉴질랜드를 떠나며

by 지구 소풍 이정희

'느림의 미학' 멈춘 시계와 사라진 거울

1738408242433.jpg?type=w773
900%EF%BC%BF20250129%EF%BC%BF124821.jpg?type=w773

보름 남짓한 시간 동안 뉴질랜드의 남섬과 북섬을 종단하며 줄곧 한 가지 생각에 머물렀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환경을 닮아가는구나.'

끝없이 펼쳐진 초록빛 목초지와 하늘을 투영하는 투명한 호수, 그리고 그 위를 여유롭게 떠다니는 구름들.

그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사는 뉴질랜드 사람들은 자연을 닮아 참으로 너그러웠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여유'라는 단어가 그곳에선 공기처럼 당연하게 흐르고 있었다.


뉴질랜드의 도로 위에는 신호등이 드물다. 대신 서로를 믿는 눈인사와 양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열흘이 넘는 여정 동안 경적 소리나 거친 다툼은커녕, 교통경찰이나 과속 단속기조차 마주하지 않았다. 속도를 감시하는 기계적인 장치들이 사라진 자리대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가 쌓여있었다.


우리가 한국과는 반대인 운전석 위치와 주행 방향 탓에 도로 위에서 쩔쩔매고 있을 때도, 그들은 그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뒤에서 재촉하는 이 하나 없이, 내가 길을 찾을 때까지 그들은 우리가 외국인임을 안듯 천천히 하라며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서툰 솜씨로 무인 주유기 앞에서 헤맬 때면 누군가 다가와 건네던 다정한 미소와 친절이 여러 번이었다. 그 '기다림'은 낯건 여행자인 우리에게 가장 따뜻한 이정표가 되었다.

효율과 속도만이 우선인 한국에서 온 우리에게, 그들의 기다림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고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이곳을 여행하며 문득 이상했던 것은 어디를 가도 시계와 거울을 찾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카페에도, 공공장소에도 시간을 알리는 시계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게 만드는 어떤 거울도 보기 힘들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이유를 물으니 돌아온 답은 명쾌했다.

"급할 것 없으니 천천히, 충분히 기다리는 삶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불평등 프로젝트 연구에 따르면, 뉴질랜드인의 하루 평균 걸음 수는 46개국 중 35위(4,582걸음)에 불과하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걷는 홍콩(6,880걸음)이나 활동량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느린 편이지요. 하지만 이 숫자는 게으름의 증거가 아니다. 이들에게 일상이란 '빨리 처리해야 할 것들'이 아니라, '천천히 해야 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상을 바쁘게 서두르기보다 무엇이든 여유 있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해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둣하다. 그러니 시간을 재촉하는 시계나 자신의 외모를 끊임없이 점검하게 하는 거울이 그들에게는 그리 절실한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되도록 빨리 해내야 직성이 풀립니다. 외모를 가꾸고, 성형이나 피부 관리, 유행하는 의상에 관심을 갖는 것을 '자기 관리'라 부르며 스스로를 채근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비교의 잣대를 들이대며, 정작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시간은 뒷전으로 밀려나곤 한다.

그래서일까?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빨리 살고 있지만, 정작 스스로 느끼는 삶의 만족도는 그리 높지 않은 것이 서글픈 우리의 현실이다.


보름간 뉴질랜드에서 만난 이들은 전혀 다른 일상을 살고 있었다. 마트에서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성분을 세심히 비교하며 그 과정을 놀이처럼 즐기는 느긋함이 있었다. 조식식당에서는 진열된 뿌리채소를 먹을 만큼 직접 가위로 정성껏 자르며 식재료가 가진 본연의 싱싱함을 음미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길 위에서 누군가를 앞질러 가야 할 때조차 미리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에게 친절과 여유는 훈련된 예절이 아니라, 삶에 깊게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서두르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의 여유로운 미소 속에 깃들어 있었다.


결국 뉴질랜드의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힘'이었다. 남보다 한 발 앞서기 위해 앞만 보는 대신, 지금 내 앞에 놓인 환경을 누리고 곁에 있는 사람의 눈빛에 집중하는 것이 그들이 가진 평온의 비결인 것 같았다.

여유로운 자연환경 덕분에 서두르지 않고,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 일상을 누리는 저들의 편안함이 못내 부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빨리, 빨리"

앞만 보고 달려오던 나에게 뉴질랜드는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제 마음도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두기로 했다. 이제 은퇴 후 일상에서도 조금은 거울을 덜 보고, 시계보다는 내 마음의 속도를 살펴야겠다.

뉴질랜드의 자연과 사람들이 가르쳐준 대로, 조금은 느리게 걷더라도 그 걸음걸음의 풍경을 온전히 사랑하며 살고 싶어진다.

image.png






작가의 이전글여름길 48, 뉴질랜드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