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길 1. 대만 1

가오슝 1일 차 (26. 1.15)

by 지구 소풍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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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오슝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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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세계적인 IT 강국이라지만, 거리에 흐르는 것은 여전히 아날로그 한 '현금'이다. 카드 한 장이면 만사가 통하는 서울의 속도에 익숙해진 내게, 가오슝 공항에 내리자마자 마주한 현금인출기인 메가뱅크 앞의 긴 줄은 일종의 입국 의례 같았다.

기계에서 뱉어내는 빳빳한 지폐 뭉치를 받아 드니 비로소 다른 나라와 다른 대만여행이 실감 났다.

지갑이 두툼해질수록 마음의 허기도 채워지는 만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벼운 신용카드보다 손끝에 닿는 종이돈의 질감이 주는 안도감, 그것이 대만이 여행자에게 건네는 첫 번째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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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미려도(美麗島, 메일리다오) 역으로 향하는 MRT에 몸을 실었다. 대만 제2의 도시라는 명성만큼 부산의 어느 한적한 경전철 노선처럼 소박하고 깔끔했다.

한 겨울 추운 한국에서 온 나는 반팔 차림인데 경량 패딩을 입은 현지인들이 한 칸에 섞여 있는 기묘한 온도 차. 그 고요한 4칸의 객차 안에서 나는 이방인의 설렘을 잠시 가라앉혔다.


하지만 개찰구를 나서는 순간, 차분했던 마음은 거대한 시각적 자극을 만났다. ‘광주충밍(光之穹頂, 빛의 돔)’.

머리 위로 쏟아지는 형형색색의 유리 조각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숨을 쉬며 색을 바꾸고 있었다. CNN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하철역 4위’라는 타이틀은 수식에 불과했다. 이곳은 목적지를 향해 스쳐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라, 빛이 발하는 거대한 침묵의 영상미술관이었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걸음을 늦추고 천장을 향해 고개를 꺾었다. 셔터 소리와 낮은 탄성조차도 저 형형색색 유리 파편 속으로 스며들어 음악이 되는 공간이다. 일부러 구경을 온 관광객들이 많았다.

문득 러시아 모스크바의 도스토옙스키역에서 느꼈던 그 묵직한 시간과 예술적 권위가 떠올랐다. 그곳과 다른 가오슝의 이 역은 권위 대신 다정한 화려함으로 사람들을 보듬고 있었다.


감동도 잠시, 호텔이 있는 11번 출구 앞에 서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에스컬레이터 없이 수직으로 급하게 솟은 가파른 계단이 무거운 캐리어를 든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망설임이 길어지던 찰나, 뒤따라오던 노신사가 인자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Korean?"

그는 짧은 영어와 정중한 손짓으로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세심히 일러주었다. 길을 알려준 것이 아니라, 낯선 도시에 긴장한 여행자의 마음을 먼저 읽어준 것이리라. 그 친절 덕분일까. 가오슝의 낡은 건물들이 더 이상 노후해 보이지 않고, 부산 영도의 골목처럼 정겹고 따스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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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오슝의 거리와 편의점의 한국 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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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 있는 선풍사찰(도교)

대로변에 있는 호텔에 체크인 후 근처 까르푸로 향하였다. 작은 개천을 따라 걷다 보니 서울의 청계천이 겹쳐 보였다. 청계천은 멋지게 꾸며져 있지만 이곳은 작은 나라, 작은 도시의 낡아가는 곳이었다. 을지로 뒷모습이랄까. 한국에 있는 듯한 거리 건물들이 익숙하게 다가왔지만 무수한 오토바이 행진은 동남아의 모습이다. 제2의 도시라는데 거리에 상점들이 편의점 외에는 별로 없다. 대만의 물가는 편의점은 서울과 비슷하고 대형마트인 까르푸의 물가와 음식값은 조금 저렴했다.


도심의 하루가 천천히 식어갈 즈음, 첫날의 마지막 여정은 도교 사원 선퐁사찰로 향했다. 낮 동안 뜨겁게 달궈졌던 거리의 공기는 해가 기울자 조금씩 숨을 고르기 시작했고, 사원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세상의 온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어둠이 내려앉자 처마마다 매달린 수백 개의 홍등이 하나둘 불을 밝혔다. 붉은빛은 밤공기 속에서 천천히 번지며 낮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대신 밤을 깊게 만들었다. 마치 붉은 별들이 낮게 떠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이 스치면 홍등들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그때마다 붉은빛이 사원을 포위했다.


사방에서는 향이 타오르고 있었다. 막 피워 올린 향의 연기는 가느다란 실처럼 허공으로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풀어지며 흩어졌다. 그 냄새는 단순한 향이 아니라, 누군가의 간절함이 타오르며 만들어낸 냄새 같았다. 사람들은 두 손에 향을 모아 쥐고 눈을 감은 채 오래 서 있었다. 그들의 입술은 부흥회의 사람들처럼 떨렸고 ,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을 것이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천천히 몸을 숙여 이마를 바닥에 대고, 다시 일어나 또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그 동작은 마치 바닷물이 밀려왔다가 다시 물러가는 것처럼 반복되었다. 누군가는 눈을 감은 채 오래 머리를 숙이고 있었고, 누군가는 떨리는 손으로 향을 꽉 붙들고 있었다.


그들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여행자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기록하고 싶어 들고 다니던 카메라가 그 순간에는 이상하게도 무겁게 느껴졌다. 셔터를 누르는 일이 어쩐지 이 장면을 가볍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들의 기도는 너무도 진하고 무거웠다. 사진 한 장으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온도였다.


그날 밤, 사원에는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 것들이 가득했다. 사람의 삶이 끝까지 붙잡고 있는 간절함, 그리고 말로 다 꺼내지 못한 소망들이 향 연기처럼 천천히 밤하늘로 흩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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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보름 동안 이어질 대만 여행이 백지 같은 마음에 작은 파문처럼 번진다.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낯선 골목의 공기와 밤시장 골목을 스치는 향신료 냄새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지도 위의 이름들—타이베이, 지우펀, 타이중, 컨팅 국립공원...


여행은 늘 먼저 마음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보름이라는 시간은 짧지도 길지도 않은, 낯선 풍경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기에 알맞은 길이 될까? 그 시간 동안 어떤 거리와 어떤 얼굴, 어떤 빛과 어떤 냄새를 만나게 될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살짝 들뜬다.

마치 첫 장을 넘기기 직전의 두꺼운 여행책처럼, 앞으로 펼쳐질 페이지들이 궁금하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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