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도의 여운들
백령도에서 1박을 하고 대청도 가는 배를 타고 제일 먼저 대청도의 명소인 서풍받이로 향했다. 해병대 부대 입구라는 이정표와 초소, 장갑차와 자주포, 군시설 철조망들이 보였다. 트럭을 타고 이동하는 젊은 해병대들이 더러 보인다.
서풍받이 둘레길 입구에 쌀 모양의 ‘해병 할머니 여기 잠들다’라는 비문을 보았다. '이선비' 할머니는 낮에는 고물장수, 밤에는 삯바느질로 생활하였는데 어느 해병의 군복을 수선하면서 해병대 장병들과 인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운 군인들의 편지를 부쳐주고 집 앞에 물통을 준비하여 훈련 중인 군인들에게 제공하고 배고픈 사병들에게 라면을 끓여주는 등 여러 선행을 베풀어 주었다고 한다.
‘해병대의 어머니’에서 세월이 흘러 ‘해병대의 할머니’로 불리었다.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해지자 장병들이 순번을 정해 할머니를 보살폈다고 한다.
2012년 87세로 별세하시자 대청도 주민들과 해병 대원들이 상여를 멨고
“내가 죽거든 해병 대원들이 다니는 길옆에 묻히고 싶다.”
유언에 따라 해병 대원들이 다니는 길옆에 안정되었다. 해병 대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기에 백령도 6여 단장이 부임하거나 퇴임할 때도 인사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 묘비는 아픈 해병들에게 귀한 쌀밥을 지어주었던 선행을 기리기 위해 쌀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해병 할머니 비석을 지나 바닷길 쪽으로 내려갔다. 발걸음이 무겁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에 신세를 더 많이 지었는데 나잇값 하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으름과 이기심에 생각만 하고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다. 멀고도 작은 대청도 섬살이가 여유롭지 않았을 형편에도 마음을 울린 해병대할머니의 미담에 참 작아지는 나를 보게 된다.
------------------------------------------------------
입구를 알리는 조형물을 지나 숲 속 순환 둘레길을 조금 걸으면 아스라한 바다가 펼쳐진다.
드디어 조금 전 보았던 경관과 다른 기이한 모습의 바위 절벽들이 모습을 보였다. 숲 속 순환 둘레길을 조금 걸으면 아스라한 바다가 펼쳐지고 조금 전 보았던 경관과 다른 기이한 모습의 바위 절벽들이 모습을 보였다.
대청도의 제일 경관인 서풍 받이는 서쪽에서 몰아치는 바람과 파도를 막는 절벽으로 깎아지를 듯한 날카로운 모습이 인상적인 기암절벽이다. 대륙에서 불어오는 강한 서풍이 불어오는 절벽은 풀 한 포기 없이 삭막하지만 위풍당당하게 사자 갈기가 듬성듬성 솟은 것처럼 보이는 사자바위, 널찍하게 펼쳐진 마당바위가 되어있었다. 사람들은 역시 서풍이 너무 강하다며 마당바위에서 발길을 서둘러 숲 속으로 향했다.
마당바위에 앉아 뭐든 날려버릴 듯한 서풍을 맞으며 혼자 오래 앉아있었다. 아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버티었다. 백령도와 대청도의 여정을 정리하며 지나온 인생도 생각했다. 널찍한 마당바위와 강한 바람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집중하며 돌아보는 쉼터가 되어주었다.
이 바람보다 더 힘들었던 순간들이 조각들처럼 튀어나오고 나는 그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추며 살아왔다. 그러는 동안 벌써 인생 한 바퀴 돌아 이제 41년 정년퇴직을 한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인생 3구간을 맞아야 한다.
'이왕에 맞을 바람이라면 부서지지 말고 허물어지지 말고 저 사자바위처럼 견디고 버티어 멋스러워지자!'
'기왕에 한 번 사는 인생이라면 내가 주인인 것처럼 살자!'
함께 한 딸이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여러 번 부르더니 나를 데리러 왔다. 이제야 동쪽의 완만한 언덕에 햇볕이 들지 않을 정도의 울창한 수풀이 자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제까지 잔뜩 있던 해무도 없고 날씨부터 대청도는 다르다.
'아우! 망망대해 반짝이는 쪽빛 바닷물과 한 사람도 없는 여유로운 모래울 해변---'
옥죽포 모래사막은 충남 신두리 사구 해안과는 많이 다른 이국적인 모래밭이다. 해안사구 옆에 모래를 막기 위한 하늘 숲길이라는 인공 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하늘 숲길의 테크 길을 걷노라면 나무들 사이마다 모래가 비집고 들어가 하얗게 싸여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대청도는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곳이기에 바닷물의 염분으로 식물이 살아남기가 힘들다.
하지만 해풍과 염분에 강한 갈대, 함초, 해국, 참 골무꽃이 있기에 더욱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대청도를 빛나게 한다는 해설사님의 설명이 있었다.
'아! 어려운 환경에 적응하며 꽃을 피워내는 저 여린 식물들, 지리적 불리함을 극복하며 방풍림을 심고 가꾸며 섬을 지켜내는 지혜로운 대청도 사람들의 애향심!'
모래언덕 중간에 낙타 조형물이 세워져 한국의 사하라 사막이라 불리기도 한다. 밀물에 밀려온 옥죽포 해변의 모래가 썰물과 햇볕에 바짝 마른 후 바람을 타고 산을 오르며 날아와서 이곳에 사막 능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대청도에서는 ‘모래 서 말은 먹어야 시집을 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다.
숙소 사장님의 친절한 안내로 가까운 농여 해변의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시간과 일몰시간까지 기다리며 쉴 수 있어 좋았다.
농여해변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걸어갈 수 있는 모래 풀밭이 있으며, 마침 물이 빠져 바닷물 사이로 1km 이상의 모랫길이 열려 걸을 수 있었다. 그래서
국내 최대 규모의 풀등이 펼쳐진다고 한다.
백령-대청 국가지질공원답게 능여해변의 바위들은 모두 기이하였고 모래언덕을 수직으로 파보면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는 사층리를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10억 년간 켜켜이 새겨진 연흔(물결무늬) 나이테 바위의 신비스러운 모습은 모두를 멈추게 하고 감탄하게 만들었다.
커다란 고목을 연상케 하는 이 바위는 퇴적된 지층이 습곡작용으로 휘어진 후 다시 풍화, 침식작용을 받아 지표에 일부분만 남은 것이다. 나이테바위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특히 썰물 때면 광활한 풀등과 어우러져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한다고 하는 해설사님의 말씀에 보지 못하는 것이 더 아쉽기만 했다.
'자연은 인간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을 만드는구나!'
대청도에서 최고로 꼽는 '한국판 우유니'라는 농여 해변의 석양을 볼 기대에 설레었다. 해 질 무렵 구름 때문에 최고의 광경을 볼 수 없었지만 풀등 안으로 이리저리 걸으며 대청도 바다를 실컷 담을 수 있어 즐거웠다. 그래서 여느 석양 모습보다 멋있었다.
백령도와 대청도는 북한이 더 가까운 섬이다. 섬주민과 군인 숫자가 비슷하여 길이나 음식점에 군인들이 많이 보인다. 해가 지려면 어느 사이 총을 든 군인들이 군사보호 지역을 지키기 위해 해변에 나타난다.
나는 해변에 더 머물지 못하는 아쉬움에 뒷걸음치며 뻘겋게 지는 해보다 해를 등지고 서있는 젊은 해병을 더 오래 보았다.
'한참 신나게 젊음을 즐길 나이인 이십 대 정직한 청년들이
국방의 의무를 해야 하고
더 힘든 해병대를 자원하여
북한의 사정거리라는 대청도까지 와서
이 시간 이렇게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
'아직도 아들의 귀환을 기다릴
군대 보낸 부모들 생각에 안쓰럽고
목숨을 잃은 어린 해병생각에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서해 한복판 대청도의 밤하늘은
저 어린 해병들 때문인지
별이 넘쳐 쏟아질 듯 가득하고
바다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조차 안심의 자장가가 되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