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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소풍 이정희 Jun 23. 2024

여름 9,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

꿈같았던 3박 4일의 기차 여행

     


시베리아 횡단 열차 풍경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닥터 지바고, 톨스토이, 도스 에프스키---'


 러시아의 소설과 영화들은 단발머리 여중생의 혼자 만의 아름다운 꿈이었다.

 부모님 몰래 밤새워 삼중당 문고를 읽고 대한극장, 단성사, 할리우드극장으로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리고 하얀 엽서에 예쁜 러시아 영화 장면을 그려 러시아 음악이 듣고 싶다며 라디오 방송국에 사연을 보내 선택된 적도 있었다.


 그때부터 러시아는 멀고 무서운 나라가 아니라 소설과 영화의 아름다운 나라였다. 금방이라도 우리 땅 두만강만 건너면 갈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방문은 쉽지 않았다.


 드디어 40년이 지난 후 딸과 함께 러시아를 방문할 수 있었다. 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3시간 비행기를 타면 갈 수 있는  유럽이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유럽에 온 듯, 아시아에 온 듯 블리디보스톡 가는 곳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독수리 전망대, 중앙광장, 잠수함 공원, 샤슬릭 식당 등을 구경하였다.

블리딕보스톡 잠수함 공원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 7박 8일을 운행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직통열차로 유명하다.


  는 블라디보스톡에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지나 유럽 끝까지 달리고 싶었다.  14일의 러시아 일정이 너무 아쉬웠다.


 기차에서 3박 4일을 지내며 3,979km의 수십 개의 역을 지나고 이르쿠츠크역에서 멈추어야 했다.


 블라디보스톡역에서 밤 9시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전에 역 앞 마트에 들렀다. 기차 안의 식당과 매점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미리 여러 가지 식사 거리와 간식, 물까지 두 봉지 가득 샀다.    한국의 과자들이 눈에 많이 띄었지만 이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과 과일을 위주로 샀다.


 큰 도시의 역인데도 시설은 그리 깨끗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처럼 대합실 의자에 누워있는 노숙자들이 많았다.

 '사회주의 국가도 가난은 어찌 못하나 보다.'


 기차 출입문마다 튼실하게 생긴 역무원들이 서서 기차표를 확인한다. 1등석이라 그런지 여권까지 꼼꼼히 보고 환영한다며 기차에 한국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비싸도 제일 좋은 1등석을 예약하였다. 영화에서처럼 빨간 카펫이 깔리고 천장에 생트리에 달린 기차를 상상하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두워진 바깥세상보다 더 어두운 통로, 단순한 창문에 간이 테이블, 의자 겸 침대가 전부이다.


 딸은 그나마 우리가 러시아 철도청 홈페이지가 열리자마자 예약해서 최초 가격으로 구입하고 좌석도 있는 거라며 지금은 가격도 비싸지고 1등석은 매진이라고 했다.

배달된 기차 조식


 기차가 출발하고 여직원이 돌아다니면서 좌석을 확인하며 아침 식사 주문을 받고 1등석 화장실과 샤워실 사용을 안내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로고가 있는 유리컵을 보여주며 기념으로 사라며 처음으로 웃음을 지으며 상냥하게 물어본다.


 가도 가도 낯설고 황폐한 들판과 호수들, 초록의 자작나무 숲을 덜컹거리며 달리고 달렸다. 간혹 작은 마을이 보였지만 아주 낡거나 짓다가 중지한 건물들이 많이 보였다.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영화 촬영이 끝나고 버린 진 세트장처럼.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가 눈 내린 자작나무 숲을 걸으면서 아름다운 여인 라라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걷고 걸어도, 썰매를 타고 달려도 보이던 끝없는 하얀 눈벌판이 아니다.

 

 "딸, 다음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을 시베리아 벌판을 기차를 타고 달리고 싶네? 언제 오면 좋을까?"  


 "나는 다시는 이 지루한 기차여행은  안 할 거야! 엄마, 지금 나이가 몇 살이야?"


 라고 말해서 한참 웃었다.

1등실 통로 의자에 앉아 열차 기념품에 커피를 마시며


 만주와 연해주를 지나 몽고와 가까워졌는지 날씨가 맑고 드넓은 초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사람들은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비가 오다 햇볕이 뜨겁다가 넓디넓은 대지에 다양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우르르 많이 내리기에 안내 책을 찾아보니 몽골, 중국으로 가는 기차로 환승하이라고 한다. 역에 서있는 많은 기차들이 다른 나라와는 달리 어둡고 낡아 보였다. 마치 러시아의 현재처럼

 난생처음 3박 4일 내내 기차를 타보는 경험은 흥미로웠다. 열차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흔들림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 흥분마저 되었지만 누우면 잠은 잘 오지 않았다.


 기차가 지루한 듯하면 기차 안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는 재미도 쏠쏠했다. 다행히 1등석이라 위치가 좋아 첫 번째 칸부터 끝까지 오고 가는 것이 편했다.

 문 열린 2등석은 2층 침대가 2개 있어 4명이 사용하고, 3등석은 통로 양쪽으로 2층 침대가 있고, 일반 좌석은 침대가 없었다.


 일부러 식당을 가는 것처럼 기차를 돌아다녔다.  3등석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에어컨이 잘 안 되는지 덥고 특이한 냄새가 났다.


 웃옷을 벗고 있는 남자들과 아이들, 삼삼오오 모여 싸우는 것처럼 큰소리로 말하고 웃는 사람들이 많았다. 통로를 지나기도 미안해서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사회주의 러시아에서도 자본주의 국가처럼 철저하게 돈에 의해 사람이 대접받는 것 같았다.


 우리는 3등석과 일반 좌석에서 버티며 가는 사람들을 보며 처음 계획과는 달리 모스크바까지 기차를 타지 않고 이르쿠츠크에서 내리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더 이상 불만하지 않기로 했다.


 기차 안에서 딸과 오롯이 집에서 가져온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으니 정말 꿀맛이다.  한국에서는 달아서 잘 안 먹던 맥심커피 맛이 기가 막히다.


 '집 떠난 지 며칠 되었나 보다. 벌써 한국음식이 그리워지다니!'


 이제 기차의 흔들림은 익숙해져서 잠도  오고 책도 잘 읽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차에서의 3박 4일은 지루하지 않고 시간이 잘 지나간다.

기차의 급수를 위해 정차한 시골역


 기차가 하루 한두 번 급수를 위해 시골 작은 역에 20-30분 정차하면 열차 안의 사람들은 모두 내려 몸풀기를 했다.

 플랫폼을 걸어 다니며 한국 사람들을 살펴보고 말을 걸었다. 대학생들과 노년의 남자들이 친구들이랑 여행 중이었고 한국 여자들은 보지 못했다.

 우리처럼 미리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철길 안의 매점과 노점상들에게 러시아 음식과 간식, 차가운 음료수를 급히 사기도 했다.

바다 같은 바이칼 호수

 마지막 날은 아쉬워서 인지 잠이 더 오지 않았다. 해가 밝아오는 새벽이 되자 통로 쪽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크게 들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달라진 열차 밖 경치에 눈이 확 떠졌다. 바다같이 드넓은 파란 바이칼 호수가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졌다.


 '아! 저곳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깊다는 그 바이칼 호수다! 내가 드디어----'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를 끼고 기차는 한참을 달렸다.

 정말 땅이 넓은 나라, 러시아의 호수이다. 시베리아 평원처럼 대단한 호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2일의 바쁜 일정 때문에 알혼섬에 가지 못하고, 바이칼 호수를 한 바퀴 순환하는 기차를 예매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러시아 영화와 소설의 여러 장면들을 떠올리자 다시 해가 지나가고 어둠이 찾아왔다. 


 어느덧 목적지인 바이칼 호수 근처 작은 도시 이르쿠츠크 역에 내렸다. 밤늦게 도착한 역은 택시기사들의 흥정소리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들은 시내는 멀고 이제 버스와 전차는 막차가 끝났다며 택시를 타야 한다며 난리법석을 부렸다.

 딸이 흥정하는 사이 어디선가 쇠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전차였다.

 

 '엄마는 참 귀가 밝네'


 '아!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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